2월 15일(경자/ 3월 17일)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도 잠잠했다. 과녁을 걸고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권준)와 광양 현감(어영담), 사량(蛇梁) 만호(萬戶) 이여념과 소비포(所非浦, 경남 고성군 하일면) 권관 이영남, 영등포 만호 우치적(禹致績,?~1628)이 와 있었다.
‘명나라에서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순찰사 이광(李洸, 이순신과는 숙질간)의 공문이 왔다. 또한, 순찰사 영리(營吏)가 보낸 보고서에는 ‘명나라 군사가 2월 1일에 서울로 들어와서 왜적을 모두 소탕했다’고 말했다. 해거름에 원균이 와서 만났다.
2월 16일(신축/ 3월 18일)
맑다. 늦은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영의정 정철(鄭澈)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 서울로 간다고 들었다.
그래서 여행 물품과 비용을 적은 문서를 정원명(鄭元溟)에게 부쳐 특별히 사신 편에 전하게 했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함께 밥을 먹고 돌아갔다. 순천 부사와 방답 첨사도 와서 보았다. 밤 10시경 신환(愼環)과 김대복(金大福)이 교서 2장과 부찰사(副察使)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보니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송도(松都)를 치고, 이달 초엿새 날에는 서울에 있는 왜적을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주) 정원명은 정상명(鄭翔溟)의 형으로 송강 정철의 조카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한산도 등을 오가며 전령을 전하고, 동생 상명과 함께 한산도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2월 17일(임인/ 3월 19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종일 샛바람이 불었다. 이영남과 허정은(許廷誾), 정담수와 강응표 등이 와서 만나 보았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에 가서 만났다.
새로 부임한 진도(珍島) 군수 성언길(成彦吉)을 만났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 우수사(원균)의 진영에 갔다가 선전관(宣傳官)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녁에 돌아올 때는 노를 바삐 저어 선전관을 만나 급히 배 위로 맞아들여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보니 ‘급히 적의 퇴로를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라’는 것이었다. 교지를 받았다는 답서를 곧장 써 부치고 나니, 밤은 이미 새벽 2시께였다.
2월 18일(계묘/ 3월 20일)
맑다. 이른 아침에 출항해서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했다. 사도 참사(김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해서 여도 만호(이인영)와 녹도 가장(假將), 좌우 별도장과 좌우 돌격장, 광양의 배 2척과 흥양 대장(代將), 방답의 배 2척 등을 거느리고 송도(松島, 창원시 진해구 웅천 2동)에 숨어 서는 모든 배들을 꾀어내도록 하니 적선 10여 척이 뒤따라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5척이 재빨리 나가 쫓을 때 나머지 배들이 일제히 적선들을 에워싸고 무기들을 쏘아대니 죽은 왜적의 숫자를 알 수 없었다. (不知其數였다). 크하하!
왜놈의 목을 하나 베자,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서 다시는 나와서 항거하지 못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여러 배들을 거느리고 원포(院浦,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로 가 물을 길었다.
어둠을 틈타 영등포 바다로 돌아왔다. 사화랑(沙火郞, 창원시 진해구 웅천 2동)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6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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