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해전으로 와키자카의 73척의 함대 중 59척이 한산도 심해에서 사라졌다. 간신히 살아남아 후방의 일본군 진영으로 도망쳐 온 왜선은 고작 14척에 불과하였다. 후방에 있었던 구키 요시타카(1542~1600)와 가토 요시아키(1563~1631)가 살아 돌아온 패잔병들에게 물었다.
“와키자카는 어찌하여 패하였으며, 너희는 어떻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느냐?”
“이순신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었습니다. 와키자카 장군의 명으로 속도를 내어 진격하다 보니 전함 간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 팀을 이룰 수 없었고, 조선 수군의 함포 사격이 집중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패잔병들의 변명이었다.
구키 요시타카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한편,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살겠다고 전장에서 도망쳐 온 데다 변명만 늘어놓는 것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참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의기투합하여 이순신 함대와 전투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교전은 불가합니다. 차라리 저희를 죽여주십시오” “저 괴물들과 싸우느니 그냥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 한산도에서 살아 돌아온 패잔병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부짖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두 장군 역시 이순신에 대한 공포로 치를 떨었다. 그들은 곧바로 퇴각할 것을 결심하고 이순신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좁디좁은 안골포로 숨어들었다.
7월 8일 한산도에서 승리한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견내량에서 그날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칠천도로 이동하였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육지에 의지해 안골포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안골포까지 쫓아가서 웅크리고 있을 왜군을 섬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견내량에서 칠천도까지 25km를 이동한 참이라 여기서 안골포까지 갈려면 또 25km를 더 이동해야 했다. 아무리 훈련이 잘되고 힘이 좋은 격군들이라 해도 무거운 판옥선을 움직이려면 휴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칠천도에서 격군들에게 하루를 더 쉬게 했다. 그리고 7월 10일 새벽 2시 칠천도에서 출격하였고, 그날 조선함대는 이른 아침 안골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숨어있는 안골포는 굉장히 좁고 얕은 포구였다.
썰물 때는 바닷물이 다 빠져 갯벌이 드러나는 곳이다. 바로 이 구석진 곳에 42척의 일본 함대가 숨어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공격하려면 밀물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지역의 만조는 오전 6시와 오후 6시였다. 따라서 공격 가능 시간도 이 시간대에 맞춰야 했다.
새벽 5시, 이순신과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가 장사진을 전개하면서 안골포로 접근했다. 안골포를 공격하기 전에 가덕도에 이억기 함대를 매복해 두었음은 물론이다. 안골포 지형은 매우 협소하고 게다가 일본군이 육지에 화포를 정착해 놓고 자신들의 함대를 엄호하고 있었다.
이순신으로서는 섣불리 공격하기에 위험 부담이 있었고, 그렇다고 밀물 시간을 놓치기도 아쉬웠다. 그래서 특별한 전술을 썼다. 2척의 판옥선을 교대로 투입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일단 판옥선 2척은 방파제 안으로 진격시키되 왜군이 장착해 놓은 포의 사정거리 경계에서 딱 멈추었다. 그 후 2척의 판옥선에서 좌우 각각 6문의 포들이 적선을 향하여 발사하였다. 조선 판옥선에서 발사된 함포의 사정거리가 육지에서 쏘아대는 일본군 화포의 거리보다 길었다.
안골포 공격을 위해 선발대로 나간 2척의 판옥선이 교대하기 위해 포구를 빠져나오고 포를 식히는 동안 다른 판옥선 2척이 참전하니 좁은 안골포의 일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안골포의 왜선 40여 척 가운데 20여 척이 박살이 나고 일부는 침몰하였다.
밤이 되자 이순신의 함대가 안골포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이때까지 안골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던 일본의 함대가 서서히 움직였다.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망가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이들을 놓쳤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본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던 부산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남해안은 이순신의 바다가 되었다. 이순신은 내친김에 부산까지 공격하고 싶었지만 오랜 기간 원정길에 오르고 큰 전투를 치렀던 장병들은 모두 지쳐있었고, 군량미와 포탄도 부족하였고 화약도 보충해야 했기에 부산포 공격은 훗날로 미루었다.
조선의 연합 함대는 가덕도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 날 견내량을 통과하여 귀향하였다. 3차 출정을 마치고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이 여수로 귀항했을 때, 여수 주민들과 장병 가족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애끓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향한 고마움과 신뢰감이 가득했다.
안골포해전(9승, 1592.7.10. 일본군 피해→전함 20여 척 침몰, 3,960명 사망. 아군 피해→13명 전사, 104명 부상) 1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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