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일본 수군의 입장에서는 7전 7패 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조선 수군의 사령관이 전라 좌수사 이순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제갈량이라고 불리는 구로다 요시타카<1546~1604, 별칭으로 ‘구로다 간베에’(黑田 官兵衛)>를 불렀다.
“이순신이란 자(者)가 대관절 누구인가?”
그러자 구로다 요시타카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조선인 포로들에게 물어봤지만, 신립(1546~1592)과 이 일(1538~1601)은 알아도 이순신이란 이름은 잘 모른다고 합니다. 저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일본 최고의 수군 권위자 구키 요시타카(1542~1600)를 불렀다.
“그대를 보내면 이순신을 잡을 수 있는가?”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순신 함대의 2배에 달하는 병력을 주십시오. 이순신의 목을 들고 오겠습니다.”
자신 있는 대답 같지만, 뒤집어 보면 같은 함대 숫자로는 일본의 수군이 조선의 수군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말하는 것이었다. 해군 전문가인 그는 나름의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지난 몇 차례 해전의 패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의 주력 선인 판옥선이 생각보다 크고 튼튼하더라는 사실, 판옥선의 함포 사정거리가 길고 정확도가 뛰어나다는 사실, 총통과 신기전 등 다양한 무기들을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조선 수군 사령관 이순신의 전술 능력이 뛰어나더라는 사실, 철갑 뚜껑이 닫혀 있는 거북선은 대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등을 파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조선 침략용 함대를 두 배로 충원시켰다. 일본의 전진 기지 나고야에서 70척의 전투선이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부산으로 증파되었다. 기존의 함선까지 더해 부산에서 일본의 주력 선인 안택선과 세키부네가 총 140여 척으로 늘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참전하고 있던 또 한 사람의 해군 군사 전문가인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 합류시켰다.
“와키자카, 너는 부산으로 가서 해전을 준비하라. 그리고 이순신을 죽여라.”
그는 오사카 앞바다인 아와지 섬을 지배하는 해적 집안 출신으로 용맹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한양을 탈환하고자 모인 삼도 근왕군 5만 병력을 용인에서 격퇴 시킨 장본인으로 임진왜란 사(史) 최고의 승전을 일본에 선사한 사람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선택된 와키자카는 한껏 고무되었다. 용인전투에서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1541~1607)의 5만 병력을 1,600여 명의 일본군으로 쓸어버렸던 와키자카 입장에서는, 전라도 관찰사의 휘하 장수인 전라 좌수사 이순신 따위야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주특기는 해전이었다.
여기서 잠시, 조선군이 7승을 거둔 이즈음에 이순신의 시(詩) 몇 구절을 음미하고 넘어가자. 이순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시와 글이었다.
22세 이후로 이순신은 책을 덮고 무예를 전공했지만, 그는 다른 무인들과 달리 무인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이미 유학을 공부하여 인문적 소양이 탄탄했고 무인의 길로 들어선 후에도 자기 수양의 측면에서 시와 글쓰기를 계속했다. 난중일기만 하더라도 그렇다. 우선 우리가 즐겨 노래한 시조 한 수를 감상하자.
한산도가(寒山島歌)
한산도월명야(寒山島月明夜)/ 상수루무대도(上戍樓撫大刀)/ 심수시하처일(深愁時何處一)/ 성강적갱첨수(聲羌笛更添愁)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을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에 잠겨있을 제 어디서 한 가락/ 피리 소리 다시 시름을 더하는고.…… 13)-계속-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