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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18

서평

by 웅석봉1 2024. 4. 2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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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부산 쪽으로 첩보 선을 보내 정탐한 결과, 일본 전함 470여 척이 부산 해안에 넓게 포진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자신들의 함대 보호를 위하여 발석차(發石車)는 물론 천자총통(天字銃筒)과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같은 조선의 화포까지 배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부산포가 무너지면 육지의 일본군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히는 것이요, 조선 침략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라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이 강력한 명령을 내린다.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순신으로부터 부산포는 반드시 지키도록 하라!”

 

당시 부산포에는 내로라하는 일본의 해군 전문가들이 다 모였다. 일본의 해군 장관이자 안골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혼쭐이 난 구키 요시타카(1542~1600), 한산도해전에 패한 후 미역으로 연명하며 겨우 살아 도망친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를 비롯하여,

 

옥포해전에서 대패한 도도 다카토라(1556~1630), 그리고 부산 주둔군의 실제 사령관인 도요토미 히데카츠(1569~1592)가 이순신의 부산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대표할 만한 사령관들이 부산포에 다 모인 것은, 그만큼 부산포가 일본군으로서는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91일 이순신은 조선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부산포로 진격했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절영도를 우회하여 부산포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이순신과 원균은 육지와 절영도 사이의 좁은 초량 앞바다를 통해 부산까지 곧장 진격했다.

 

이순신의 함대가 초량 앞바다 길목에 들어서는데, 일본의 주력 선인 세키부네 4척이 겁도 없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4차 출정 후 처음 경험하는 일본 수군의 돌격전이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들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해 오는 일본의 함선을 보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돌격해 온 일본 수군들은 스스로 바다에 빠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빠진 일본군들은 육지를 향해 헤엄을 쳐서 도망가는 장관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 없는 배만 조선 수군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어허허

 

4척의 세키부네에 탑승한 일본군 입장에서는 부산포의 사령관들이 지켜보는 상황이라 도망갈 수 없는 지경이지만, 한 번도 이겨본 일이 없는 일본군은 그냥 죽은 것보다는 발버둥이라도 치자는 계산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으리라. 샌드백 역할을 하던 4척의 세키부네를 바다 위에 잠재운 뒤 이순신과 원균은 초량 목을 건넜다. 으하하

 

일본의 부산 주둔군 사령관을 맡았던 도요토미 히데카츠란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의 전초 기지이자 일본군으로서는 가장 안전한 지대라 할 수 있는 부산포에 머물던 그가 임진년 91일 이순신의 공격을 받고, 정신적 충격은 엄청났다. 그는 결국 이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초량목 해전(15, 1592. 9.1, 일본군 피해전함 4척 전파, 380여 명 사망. 아군 피해없음)

부산포해전(16, 1592. 9.1, 일본군 피해전함 128척 침몰, 3,834명 사망, 1,200명 부상. 아군 피해7명 전사, 25명 부상)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한 날은 159291일이었다. 양력으로 계산하면 105일이다. 그래서 오늘날 부산 시민의 날105일이 되었다. 이순신이 부산포를 공격해서 대승을 거둔 날이 바로 부산 시민의 날이 된 것이다. -18)-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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