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주) 이글은 《동서 문화사》가 2014년에 발행한 고산 고정일(1940~2021)의 역해(譯解) 『난중일기』와 2023년 《역바연, 역사 바로잡기 연구소》에서 발행한 황현필(1973~현재)의 『이순신의 바다』라는 책을 읽고, 한편으로는 인터넷을 뒤져 공부해 가면서 쓴 글임을 밝혀둔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맞아 수군을 총지휘했던 충무공 이순신의 전쟁 일기다.
이순신(1545~1598)은 덕수 이씨 9대 자손으로 현, 서울 중구 을지로18길 19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관음포의 노량해전에서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고 판옥선(板屋船) 선상에서 전사하였다.
아버지 이정(李貞, 1511~1583)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차례로 희신(羲臣, 1535~1587) 요신(堯臣, 1542~1573), 순신(舜臣)과 우신(禹臣)이다. 아들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와 요. 순. 우 임금에서 지었다고 전한다. 신(臣)은 돌림자(항렬, 行列)다.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에 대한 효심은 난중일기 100여 곳에 나오는데, 그는 어머니를 천지(天只)라 적었다. 천지(天只)는 『시경』의 모야천지(母也天只)에서 따온 말이다. 어머니가 바로 하늘이라는 뜻이니 어머니를 얼마나 지극히 사모했는지 상상키 어렵다.
사당(祠堂)은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번지에 위치하며, 묘소(墓所)는 북쪽으로 8km 떨어진 덕수 이씨 선산,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8,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사적 제112호, 이후 부인 상주 방씨와 합장)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이충무공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의 묘소도 같이 있다.
그는 어려서(1555년, 11세)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스물한 살(1565년 8월)에 보성군수 방진의 딸(무남독녀)과 결혼하였고, 그는 어린 시절에 군사 훈련장인 한양의 훈련원 부근에 살면서 전쟁놀이를 즐겨 하였고, 장인이 무관 출신이라 이순신이 무예를 연마하고 무관이 되는데, 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스물여덟(1572년 8월)에 무과 별시에 응시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져 부상 중에도 끝까지 시험을 치렀지만 아깝게 낙방하고, 1576년(선조 9년) 2월에 식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르는 최고의 과거시험으로 무과는 전국에서 스물여덟을 선발했다.
1576년 2월 당시 식년 무과에는 동점자가 있어 스물아홉을 선발하였고, 이순신은 병과 4등(전체 12등)의 준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무과 합격자의 평균 나이는 서른네 살이었는데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조선의 무과 합격자들은 말을 타고 칼을 쓰고 활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서 제대로 된 정규 무인 코스를 수년간 연마한 프로급 무사들이었다. 그도 역시 체력이나 완력 그리고 활쏘기가 뛰어난 무사였다.
첫 부임지인 백두산 아래 험준한 변경인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 현재의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으로 임명되어 만 3년을 근무하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1579년 2월에 한양의 훈련원 봉사(奉事, 종8품)로 배속되었다. 당시 병조정랑(정 5품, 지금의 국방부 인사과장)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그가 강력히 반대했고, 그래서 8개월 만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군관으로 좌천되어 해미 병영(서산 해미읍성)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로서는 첫 시련이었다. -계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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