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경찰은 시위주동자와 관리소장을 동시에 불러 조사를 하면서, 우선 관리소에 보관된 8동 A 라인의 CCTV 테이프를 임의 제출 형식으로 넘겨받아 신원 파악에 들어갔다.
경찰로서도 성추행 피해자의 고소가 없는지라 정식 수사는 하지 못해도 엘리베이터에 대자보를 붙인 사람의 신원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경찰 지구대에서 한 시간에 걸쳐, 테이프를 꼼꼼히 돌려 보았으나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날 엘리베이터 안에 대자보를 붙이는 두 사람이 스크린에 잡혔으나, 경비를 제외한 한 사람은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이 어려웠다. 더욱이 CCTV가 흑백이라 색깔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8동 세대 주 180명 모두를 소환해서 조사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사정이 그러하니 경찰로서도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어 자치회와 경비업체가 잘 협의해서 해결하라는 식의 중재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사에 진전이 없자 시위는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날이 갈수록 그 숫자는 늘어만 갔다. 때맞춰 날씨도 좋았다. 오늘은 삼십 명이 넘었다. 모두가 스스로 촛불과 음료수를 가지고 나왔다.
시위대 중에는 이제 남자도 몇몇 있었다. 이들은 소주에 마른오징어를 찢으면서 경비업체를 성토했다. 핸드마이크도 등장했다. 1301호와 502호는 신이 났다. 이제는 경비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외치는 민의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경비업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일부 술을 마신 주민들은 관리소를 박살 내자는 주장도 있었다.
경찰도 전경 몇 명을 관리소 앞에 배치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시위대는 밤 9시가 넘으면 자진 해산했다.
무립은 시위대가 물러간 현장을 둘러보았다. 시위대가 깔고 앉았던 신문지 몇 장이 바람에 휘날렸다. 휘날리는 종이를 보고 무립은 생각이 깊다. 그도 예절이 무엇이며, 또한 정의가 무엇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 공공의 질서를 침해하는 일을 방치해도 되는가? 우리 새싹들이 바르지 못한 길을 걸어도 되는가? 이러고도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가? 무립은 눈을 감았다. -계속-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