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시인은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께 울며 여쭙고 싶었을까? 사나이라면 알만하지 않겠는가. 자고로 어머니는 인정이 많고 자상하다.
그러니 어찌 어머니 앞에서 차마 그런 일들을 다 여쭐 수 있겠는가. 그러니 대범한 아버지일 수밖에.
시인이 왜 글을 아껴 쓰며, 왜 말이 어눌할까. 천성일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유가 더 있다고 본다.
시인은 코스모스처럼 들판에서 이런저런 자연도 구경하면서 느리게 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빨리 돌아가고 있다.
이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게 아니다. 좀 더 천천히 느리게 살자. 시인의 다른 시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강한 동행 충동을 느낀다. 나도 살면서 누구에게 핍박해 본 일 없는 빈 호주머니였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그간의 일들’이 많다.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울며 고할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어머니가 계시고 고향의 사람들이 있고 산과 들과 강이 있다.
그리고 추억이 있지 않은가. 돌아가서 그들에게 모두 다 툭 털어놓고 진짜 자유인이 되고 싶다.
시가 우리에게 무엇을 묻는가? 아니 시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핍박받고 상처 난 삶이 억울하니 보상을 해 달라고 하는가. 아니면 억울함의 하소연인가.
아니다. 인간의 자연 회귀 본능을 말한 것이리라.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 나도 더 늙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리하여 무거운 등짐을 고향의 산천에 묻고 세상을 놓아 버리자. 짧은 시 한 편이 내 마음을 이리도 흔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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