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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임의 침묵>

시평

by 웅석봉1 2023. 10. 3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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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 침묵>

 

임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내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이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헤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임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의 <임의 침묵> 전문.

 

<시인 소개>

 

한용운(1879~1944, 본명 정옥. 호 만해) 시인은 충남 홍성(결성면)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896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의 부친 한응준은 충훈부(忠勳府)에서 종5품 도사(都事)로 있다가 1894(고종 31) 12월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이승우(李勝宇)의 참모관(參謨官)이 되어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하다가 전사한다. 이때의 충격이 출가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1905년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수계(受戒) .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으로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운영 중이던 우당 이희영(1867~1932) 등의 신흥무관학교를 방문, 견문을 넓히고 격려한다.

 

뒤이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에 귀국하여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대승불교의 반야 사상(般若 思想)에 근거하여 종래의 타성에 빠져있는 조선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평소 입이 거칠며 곡차를 좋아해 괴짜 스님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가 수행에 정진함. 1919,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자진 체포당한다.

 

이후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해서 민족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임의 침묵을 출간하고 저항 문학에 앞장선다.

 

한편 어려운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뽑아서 불교대전(佛敎大典)를 간행하였고, 유심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지키려고 노력함.

 

만해의 작품으로는 임의 침묵,외에 나룻배와 행인, 당신은 보았습니다, 복종, 알 수 없어요, 이별은 미의 창조, 찬송, 타고르의 시 Gardenisto를 읽고, 등이 있다.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뇌졸중으로 입적함.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 공로 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고향인 홍성에 생가를 복원하고, 만해 체험관도 건립되었다.

 

한편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 입구에는 만해 기념관이 건립되어 한용운의 유품 등 관련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나무위키등 참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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