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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규의 <밥그릇 경전>

시평

by 웅석봉1 2023. 10. 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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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자서(自序) 1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 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와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 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화성에서 이덕규. 첫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의 자서.

 

자서(自序) 2

 

한여름 초록 들판을 전심전력으로 달려 건너온 푸른 사내의 심장을 녹즙기에 내려 마셨다.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든 내 몸속에서 한결 맑아진 서늘한 도랑물 소리가 난다. 201511월 이덕규. 놈이었습니다의 자서.

 

<시인 소개>

 

이덕규 시인은 경기도 화성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다. 시인은 1961516,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서 태어나 토목기사로 일하다가 1998현대시학으로 등단, 전업 시인이 되었다.

 

그는 정남면의 <보통 저주지>를 끼고 500m 내려가면 흙과 나무로 지은 집, <토우방(土愚房)>에서 살면서 시를 쓴다.

 

첫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2003)와 두 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2009), 그리고 세 번째 시집, 놈이었습니다(2015), 최근(2023)에는 오직 사람 아닌 것을 출간하였다.

 

수상 경력으로는 현대시학 작품상(2004), 시작 문학상(2011), 오장환 문학상(2016)을 받았다. 그는 2009년 노작 홍사용 문학관장과 경기 민예총 문학 위원장을 역임하고 2020131일에 경기 민예총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밥그릇 경전>2004현대시학작품상 수상작임. *나무위키 등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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