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자서(自序) 1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 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와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 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화성에서 이덕규. 첫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의 자서.
자서(自序) 2
한여름 초록 들판을 전심전력으로 달려 건너온 푸른 사내의 심장을 녹즙기에 내려 마셨다.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든 내 몸속에서 한결 맑아진 서늘한 도랑물 소리가 난다. 2015년 11월 이덕규. 『놈이었습니다』의 자서.
<시인 소개>
이덕규 시인은 경기도 화성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다. 시인은 1961년 5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서 태어나 토목기사로 일하다가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전업 시인이 되었다.
그는 정남면의 <보통 저주지>를 끼고 500m 내려가면 흙과 나무로 지은 집, <토우방(土愚房)>에서 살면서 시를 쓴다.
첫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2003년)와 두 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2009년), 그리고 세 번째 시집, 『놈이었습니다』 (2015년), 최근(2023년)에는 『오직 사람 아닌 것』을 출간하였다.
수상 경력으로는 현대시학 작품상(2004), 시작 문학상(2011), 오장환 문학상(2016년)을 받았다. 그는 2009년 노작 홍사용 문학관장과 경기 민예총 문학 위원장을 역임하고 2020년 1월 31일에 경기 민예총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밥그릇 경전>은 2004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임. *나무위키 등 참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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