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그림 한 장
그림은 나에게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미술 시간은 고역이었다. 당시 우리는 그 시간에 가끔 크레용과 도화지를 들고 야외로 나왔다.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서다. 그런 미술 시간이 그렇게 싫었다. 변명하자면 나에게는 연장이 부족했다.
팔레트는 물론 없었고, 아마 크레용도 처음에는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손바닥만 한 크레용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적어도 20색이나 24색의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미술 시간이 되면 사기부터 떨어졌다.
그러니 내가 형편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미술 과목은 아예 ‘미’ 정도 받으면 다행으로 여겼다. 나의 미술에 대한 기초가 이러하니 그 이후 학교생활에서도 미술에 관심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력으로 사회에 나왔으니 자연히 미술에 문외한이 되었다. 명화가 로비와 재테크의 수단이라고 언론에서 떠들어도 아예 귀를 막고 살았다. 돈도 시간적 여유도 그림을 보는 안목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도 많이 흘러가 버렸다. 이제 평생직장에서 은퇴하고 새로운 인생 3막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로 고민하고 있는데 문학이 나를 유혹하였다. 따지고 보니 문학은 화려하지도 따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돈도 많이 들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소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주인공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그 과정은 바로 인생 그 자체다. 그것이 재미있고 좋아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미술도 일종의 문학이다. 오늘은 옛 시절을 회상하며 세계의 주요 미술관을 살펴본다.
우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성모자와 성 안나>,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 현대 미술관에 걸려있는 <아비뇽의 처녀들>, <별이 빛나는 밤에>,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풀밭 위의 식사>, <만종>, 그리고 루브르의 <모나리자>, <표류하는 오르페우스>,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성 제롬>, <예수의 세례>,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초원의 마돈나>, <사과를 깎는 여인>,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의 <연애편지>, <야간 순찰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비너스의 탄생>, <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목자의 경배>, <시녀들>, 등등 수많은 그림이 차례로 떠오른다.
한참을 집중하니 드디어 한 장의 그림이 내 가슴속으로 차고 들어왔다. 저만치 개울에 한 여인이 흐르는 물을 만지는 듯 볼일을 보는 듯하고, 또 한 여인은 나체에 턱을 괴고 이쪽을 응시하고, 정장의 두 남자는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다. 그는 사실주의 화가였지만 인상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대표작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가 파리 사회에서 비난과 증오로 배척당했다.
당시 파리에는 12만 명에 달하는 매춘부가 득실거렸다니 상류사회의 성적 문란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그들의 치부(恥部)를 밝혔으니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네는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그렸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당시 살롱의 권위에 도전하는 최초의 작가였다.
한편 파리는 화가들의 천국이었다. 나폴레옹 3세의 문화정책은 살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살롱은 아카데미의 가치를 보여주는 장소였다. 아카데미가 권장하는 기법은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물감칠을 매끄럽게 하고, 주제도 전통적인 화가들이 다룬 내용에 충실할수록’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풀밭 위의 점심>은 대 반란이었다. 정밀하지도 매끄럽지도 전통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비난은 당연한 결과였다.
<풀밭 위의 식사>는 아주 산만하다. 그림 속 네 사람은 모두 보는 방향이 다르다. 자세도 모두 흐트러져있다. 정물화도 아니고, 인물화도 아니다. 그렇다고 풍경화도 아니다. 청춘 남녀 두 쌍이 성욕을 불태우는가? 두 화가에 두 모델인가? 아니면 매춘부의 시위인가? 어쨌든 모호하다.
하지만 세상의 빛을 온몸으로 받는 누드의 여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속물아, 나를 비웃지 마라. “너 자신을 알라.” 마치 탈레스가 나를 감시하는 듯하다.
마네는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한 공적이 인정되어 만년에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용 도뇌르>도 받았다. 역시 선구자를 알아주는 프랑스가 부럽다.
그러나 그는 많지 않은 나이인 쉰한 살에 신경계의 진행성 퇴화, 매독 말기 증상 등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지금 센 강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이 바라보이는 샤요궁 뒤의 파시 공원묘지에 평화로이 잠들어 있다. 2009년 겨울 어느 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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