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김삿갓》 165
<내가 왜 독신(獨身)입니까? 금강산 구경을 가던 길에 무봉(無縫) 선생한테 붙잡혀서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지, 고향(故鄕)에는 처자식(妻子息)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오.>
<처자식이 있기로 그게 무슨 상관이오,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를 하나만 데리고 산단 말이오, 그 애는 제법 쓸 만한 아이라오, 가만히 보니까 그 애도 삿갓 선생을 남몰래 흠모(欽慕)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삿갓 선생(先生)의 옷 걱정을 할 이유(理由)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애가 만약 불행(不幸)하게 되거든, 선생은 그 애를 꼭 거두어 주시오, 나의 간곡한 부탁(付託)이에요>
김삿갓은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취한 사람을 상대로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해보았자 귀결(歸結)이 맺어질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얘기는 그때 가서 보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于先) 술이나 마십시다>
하고 억지(抑止)로 휘갑을 쳐버렸다.
무봉은 워낙 끈기가 강한 데다가 무슨 일이나 자기 맘대로 밀어, 붙이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김삿갓은 그의 함정(陷穽)에 빠져들까 봐 은근히 두려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봉(無縫)은 새삼스레 술을 권하면서,
<우리가 언젠가는 남매간(男妹間)이 될 것을 나는 꼭 믿고 있소이다, 그런 의미(意味)에서 내 술을 한잔 받아 주시오>
하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술잔을 받기는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겁이 나 견딜 수 없었다. 무봉(無縫)이 언제 무슨 술책(術策)으로 자기를 업어 넘기려고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백락촌(百樂村)을 떠나 버릴 궁리(窮理)를 골똘히 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언젠가는 이 마을을 떠나 버려야 할 몸, 하루속히 후계자(後繼者)를 선정해 놓고, 나는 나대로 방랑(放浪)의 길에 오르기로 하리라)
김삿갓은 그런 결심(決心)을 하고 후계자를 사방(四方)으로 구해 보았으나 적임자(適任者)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무봉과 만나기를 의식적(意識的)으로 기피(忌避)해 가면서, 날마다 해월정(海月亭)에 올라가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아 오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저물어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삭막(索莫)해지는 겨울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세월(歲月)은 흘러가는 물과 같아서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 옛날 시성 이태백(李太白, 701~762)은 춘야연(春夜宴)이라는 시의 서문(序文)에서,
천지는 만물의 여인숙<(천지자(天地者) 만물지역여(萬物之逆旅)>이요, 광음은 영원한 나그네<(광음자(光陰者) 백대지과객(百代之過客)>이다, 라고 말 한 일조차 있었다.
겨울로 접어들며 바람이 스산해지자, 한차례의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나뭇잎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낙엽은 계절의 전령(傳令)이어서 공맹재(孔孟齋)의 뜰에도 날이 갈수록 낙엽(落葉)이 쌓여 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뜰에 낙엽이 쌓여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선조(宣祖) 때 시인 김효일(金孝一, 생몰 연대 미상)의 추사(秋思)라는 시가 연상되곤 하였다.
만정오엽산서풍(滿庭梧葉散西風), 고몽초회촉루홍(孤夢初回燭淚紅),
창외후충추사고(窓外候蟲秋思苦), 반인제도오경종(泮人啼到五更終),
*해석해 보면,
바람 따라 뜰에 가득 오동잎 지는 소리, 외로운 꿈 깨어 보니 촛불도 눈물지고,
창밖의 귀뚜라미 가을 생각 서러운가, 기나긴 한밤을 사람 따라 울어 예네.
김삿갓은 본시 역마직성(驛馬直星)을 타고난 사람인지라 언제인들 떠돌아다니고 싶은 심정(心情)이 없으리오마는, 특히 계절(季節)이 바뀔 때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싶은 생각이 더욱 절실(切實)하였다.
그럴 때면 글방 아이들을 접장(接長)에게 맡겨 버리고 자기는 해월정(海月亭)에 올라가 자연(自然)을 즐기는 것을 일과(日課)로 삼아 오고 있었다.
자연(自然)의 변화(變化)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하기 이를 데 없어서 봄은 봄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좋고, 가을은 가을대로 좋고, 겨울은 겨울대로 좋은 것이 대자연의 특징(特徵)이었다.
봄철에는 꽃이 좋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꽃을 찬양(讚揚)하지만, 당나라의 시인(詩人) 두자미<(杜子美, 두보(杜甫, 712~770)의 자(字)>는 산행(山行)이라는 시 속에서,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해석하면,
단풍 든 나뭇잎은 봄꽃보다도 붉구나!
하여 단풍을 꽃보다도 아름답게 여겼고,
《정비석(鄭飛石) 풍류소설(風流小說) 《소설 김삿갓》 (제2권), 94쪽~97쪽-계속-(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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