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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106

서평

by 웅석봉1 2025. 3. 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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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의 장심은 왜 있을까?

 

장심은 몸의 무게를 떠받치는 지면에서 오는 충격을 완화해 주기 위함이다. 맨발로 걷고 난 뒤 발자국 모양을 보면 가운데 부분만 찍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발바닥에서 움푹 들어간 이 부분을 장심(掌心)이라고 한다. 발바닥은 엄지발가락, 새끼발가락, 발꿈치를 꼭짓점으로 삼아 아치를 그리며 몸의 무게를 지탱한다.

 

장심은 지면에서 발에 전해지는 충격을 완화해 주는 역할을 한다. 흔히 장심이 없는 발을 평발이라고 한다. 정확한 용어는 강직성 편평발이다. 평발인 사람은 충격이 발바닥 전체에 가해져 통증과 피로가 쉽게 온다.

 

갓 태어난 아기의 발바닥에는 장심이 없다. 서거나 아장아장 걷는 과정에서 장심이 점차 발달한다. 어른도 항상 자동차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거의 걷지 않으면 장심이 점점 없어질 수 있다. 동물은 장심이 없다. 개와 고양이 등은 발 볼록 살이 충격을 완화해 준다.

 

과학 잡학사전 통조림 <인체 편>(지식을 쌓으려면 통째로 조목조목!) <엮은이 키즈나출판 편집부, 옮긴이 서수지, 감수 이경훈, 하라다 도모유키(原田知辛) (사람과 나무 사이, 2023)>, 88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29(무오/330)

 

맑다. 새벽에 우후 이몽구(李夢龜)가 배 두서너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 풀을 베러 나갔다. 아침에 고성 현령 조응도(趙凝道)가 돼지고기를 가지고 왔다. 그에게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 백성들이 굶어서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어떻게 목숨을 보전하여 살 것인지>를 물었다.

 

늦게 사정(射亭)에 올라 활 10 순을 쏘았다. 이유함(李惟諴)이 와서 하직을 고하므로 그의 자()가 무엇인지 물으니 여실(汝實)이라 했다. 순천 부사 권준(權俊)과 우조방장(右助肪將) 어영담(魚泳潭), 우우후(右虞候) 이정충(李廷忠), 사도 첨사 김완(金浣), 여도 만호 김인영(金仁英),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 강진 현감 유해, 사천 현감 기직남(奇直男), 하동 현감 성천유(成天裕), 소비포 권관 이영남(李英男)도 왔다.

 

저물녘에 보성 군수 안홍국(安弘國)이 들어왔다. 무군사(撫軍司)의 공문을 가져왔는데, 세자를 호위할 때 쓸 긴 창 수십 자루를 만들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날 동궁의 추고(推考)에 대한 답변을 써 올렸다.

 

) 안홍국(安弘國, 1555~1597)은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선전관이 되어 이순신에게 왕명을 전하고 1595년 보성 군수로서 진영(陣營)에 왔다가 1597년 원균의 휘하로서 안골포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210(기미/331)

 

가랑비가 걷히지 않고 바람까지 거세게 불었다,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 수사가 와서 저녁때까지 왜적을 토벌할 궁리를 하였다.

 

211(경신/41)

 

맑다. 아침에 미조항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이 왔기에, 술 두서너 잔을 권하고 보냈다. 종사관 정경달(丁景達)에게 공문 3통을 써서 보냈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사정에 올랐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왔다. 술 십여 잔에 취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니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우조방장(右助防將)도 같이 취했다. 저녁에 활 3 순을 쏘았다.

 

212(신유/42)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探候船)이 들어왔는데 조카, ()의 편지 내용에, 선전관 송경령(宋慶笭)이 수군을 시찰코자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오전 10시경에 진영을 적도(赤島, 화도)로 옮겼다. 오후 2시쯤 송경령(宋慶笭)이 임금의 교지 2통과 밀서 1통을 가지고 왔다.

 

1통에는 명나라 군사 10만 명이 은() 300냥이 가지고 온다고 했고, 1통에는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해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살펴 무찌르라고 했으며 밀서에는 여러 해가 지나도록 바다 위에서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병들을 잊지 못하니 공을 세운 장병들 가운데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보고하라고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 서울의 여러 가지 소식을 묻고 왜적들의 일도 들었다. 임금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의 편지도 왔다.

 

213(임술/43)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영의정께 답장을 썼다. 아침을 먹은 후에 선전관 송경령(宋慶笭)을 불러 대화하고 작별한 후에 종일 배에서 머물렀다. 오후 4시쯤 소비포 권관 이영남(李英男)과 사량(蛇梁) 만호(萬戶) 이여념(李汝恬), 영등포 만호(萬戶) 우치적(禹致積) 등이 왔다. 오후 6시경 출항해서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상 우수사 군관 제홍록(諸弘祿)이 삼봉(三峯, 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으로 와적선 8척이 들어와 춘원포(春院浦)에 배를 대고 있으니 공격할 만하다했다.

 

그래서 곧 나대용(羅大用)을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에게 보내 작은 이익을 보고 공격하다가 큰 이익을 놓칠 수 있으니 아직은 가만히 두었다가 적선들이 많을 때 총공격을 하자는 말을 전했다.

 

미조항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과 순천 부사 권준(權俊), 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박영남(朴永男), 송덕일(宋德馹)도 돌아갔다.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과 흥양 현감(縣監) 배흥립(裵興立)이 들어왔다.

 

) 제홍록(諸弘祿, 1558~1597)은 갑오년 이순신의 군관이 되었고 1597624일 왜군에 고립된 진주성을 지키다가 적장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10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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