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대 시인의 <이부자리>
박영대 시인은 등단 10년 차 된 중견 시인이다. 시인은 청춘을 오직 농업과 농촌을 위해 일하다가 지난해 초 농협 신용산지점장을 끝으로 정년(명예퇴직)을 맞았다. 만 40년 만에 정든 자연으로 돌아온 박 시인은 지금 단양 팔경 하선암 계곡 아래 <아리산방>이라는 아주 작은 글방을 지어 인생 3기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최근 발간한 서울농협 동인 소식지(31호)에 기고한 글에서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회고하였다. 80년대 초 충무로에 있는 <설파>라는 카페에서 매달 한 번씩 ‘토요일 오후와 시’라는 표제로 시 낭송 모임이 있었고 그 회원이 되어 시를 공부했다고 한다. 가끔 원로 시인 서정주도 그곳에서 만났다고 기억했다.
시인은 문예사조 금년 1월 호에 <허락> 외 4편의 시를 발표하여 이달의 시인으로 선정되었고, 지난해에는 <세계시인대회조직위원회> 이사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문인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 4월 아들 혼례를 치르고 이제 좀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시 한 편을 지어 축하의 답례로 지인들에게 보냈다. 제목이 <이부자리>라는 시다.
내가 아는 박영대 시인은 천생(天生)이 시인이다. 40년 지기인 그는 아직 남에게 큰소리 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하다못해 남들 다하는 술주정 한 번 부리는 법이 없으니 무골호인이다. 반가운 마음에 그의 시를 읽으니 느낀 감흥이 오래 남아 여기 감상문을 올린다. 우선 그가 보낸 시 <이부자리> 전문(全文)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개어 있을 때는 아버지 /깔면 어머니 /자식들 맨살에 온기를 깁는다/ 한 땀에 울고 /한 땀으로 꽃피워 /짝 맺게 하고 /또 한 땀으로 새집 떠나보내는 손 매듭// 손 아니면 /맨손 아니면 /덧나는 민감한 흔적 /태운 재로 소독하고있다/ 발하지 않은 달항아리 /눈부심 걷어가는 도공의 또 한 땀 /재 속에서 찾아낸 달빛 /밤을 모아 젖내 적시고 있다// 뒤트는 잠결 /걷어차는 꿈 /찬 모서리 고이 감싸 다시 덮는다/
옷 벗는 가벼움으로 /오늘도 너를 깔고 덮는다>
시인은 아들을 분가시킨 날 저녁 아내와 둘이서 녀석의 빈방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는 주인을 잃고 홀로 갈려있는 이부자리를 만지면서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살아계셔서 당신의 손주 장가가는 그 흰 손을 잡아 보셨으면 얼마나 대견해하셨을까. 자식들 맨살에 온기를 깁는 아버님의 그 모습이 시인의 가슴으로 되돌아온다.
돌아온 자신 모습에서 이제 떠나버린 아들의 얼굴이 웃는다. 이부자리 만들 때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이 갖은 정성 다하여 키운 녀석이 아니던가. ‘재 속에서 찾아낸 달빛’이라 했으니 얼마나 귀한 자식이던가.
때로는 친구 같고 또 때로는 든든한 세상 같은 녀석이 아닌가. 하긴 지금 생각하니 남들처럼 귀히 키우지 못함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녀석의 젖내가 그가 떠난 이 방을 맴돌고 있다. 시인의 가슴에 남아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시인은 이부자리에 눕는다. 그러나 잠이 쉬이 들 리가 없다. 이리저리 뒤척인다. 시인은 살아온 길과 앞으로의 길을 생각한다. 시인도 아들도 크면 제 짝을 찾아 부모를 떠나리라는 진리를 왜 모르겠는가.
그래서 ‘옷 벗는 가벼움으로’ 너를 ‘깔고 덮는다’ 했으니 우리 걱정은 말고 너희들이나 부디 잘 살라는 메시지다. 그래요. 세상에 내 인생 누구라 대신 살아 주리. 나 이외에 나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내라도 그렇고 자식이라도 그렇다. 인생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친구는 뭐고 가족은 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하루의 일과를 생각하고 우리의 임종을 생각해 보시라. 인생이 무엇인지 다시 음미하게 된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다.
박 시인은 농협에 은퇴하기 전에 단양에 글방을 손수 지었다. 그는 2009년 9월 9일 이 글방을 꾸미고 나서 ‘부디 이 산방이 도회에서 찌들고 얽매이기만 했던 지금의 나를 더욱 열린 자연인으로 화동순리(和同順理)하는 단초가 되기를 바래본다’고 그의 심정을 피력하였다. 그는 구비(굽이)를 이루면서 흐르는 계곡의 유려함이 화동순리라 말한다.
시인은 또 이 글방을 <아리산방>이라고 명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집 이름을 <아리산방>이라고 지었다. 아리는 아리랑에서 가져왔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 정서의 정수다. 우리 민족 문화의 모두가 아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너무 큰 이름이어서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끝까지 추구해야 할 화두가 아리랑인 것을.....,’ 그의 블로그에 적고 있다.
그렇지요. 아리랑이야말로 삼천리 금수강산 뼛속까지 물들어 있는 우리 민족의 혼이 아니겠는가. 또한 ‘아리’는 우리 농협의 마스코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그런 ‘아리’를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닉네임도 <아리박>이다.
시인의 농협 사랑은 퇴직하고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친지들이 찾아오면 먼저 관내 지부장에게 연락하여 음식점 추천을 받아 안내한다. 음식점에 가서는 꼭 “농협 지부장이 여기가 단양에서 최고라고 하더라.” 그래서 왔노라 하고 농협을 팔며, 여가 여가로 옛 고객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농협을 계속 애용해 달라고 부탁도 하고 초청도 한다.
그가 재임 시에 한 말대로 그는 영원한 지게꾼 농협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 동인의 자랑이다.
<이부자리>를 읽으면서 잊고 살았던 아버님이 그리워지고 아이들 키우던 옛 시절이 흘러간다. 농협에서 근무한 세월도 흘러간다. 아무리 세월은 흘러도 농심은 떠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늘 높이 치솟을 것이다. <아리산방>의 화목과 박 시인의 좋은 시를 기다린다.
201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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