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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61

서평

by 웅석봉1 2024. 7. 1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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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계축/ 101)

 

맑다. 견내량(見乃粱,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이르러 배를 세우고 우수사와 이야기했다. 순천 부사 권준도 함께 했다.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角呼寺)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다.

 

) 각호사(角呼寺)는 고려시대 불상인 오량리 석조여래좌상을 절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지금의 신광사에 보관하고 있어 그곳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해안가에서 너무 안쪽이며 당시 오량(烏良)에는 해안가 근처에 오량성(烏良城)이 있었던 자리에 오량역(烏良驛)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앞바다에 정박했다면 오량역이라는 지명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각호사(角呼寺)는 견내량과 칠천량 사이 거제도 북쪽 바다와 가까운 사찰로 추정됨.부산 아재의 역사 읽기. <적연> 블로그에서 인용함.

 

827(갑인/ 102)

 

맑다. 영남 우수사(원균)와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漆乃島, 거제시 하청면 漆川島)에 이르렀다. 웅천(熊川) 현감 이종인(李宗仁, 1556~1593)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듣자 하니 왜적의 머리 35급을 베었다고 말했다.

 

저물녘에 제포(齊浦,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를 건너니 밤 열 시쯤인데, 하늬바람(西風)이 세게 불고 나그네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828(을묘/ 103)

 

맑다. 새벽에 가만히 앉아 지난밤 꿈을 생각해 보니, 처음에는 흉몽 같았는데 생각하니 길몽이었다. 가덕(加德)에 도착했다. (829일부터 12월 말까지 일기는 빠져있음)

 

계사년 2(15932) 11일부터 130일까지의 일기는 빠져있음.

 

21(병술/ 33)

 

종일 비가 내린다. 발포 만호 황정록(黃廷祿), 여도 권관 김인영(金仁英),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와서 함께 모였다. 발포 진무 최이(崔已)가 두 번이나 군율을 어겼으므로 군율로써 처형(사형)했다. 흑흑흑

 

22(정해/ 34)

 

늦게야 개었다. 녹도 가장(假將), 사도 첨사 김완, 흥양 현감 배흥립 등의 배가 왔다. 낙안 군수 신호(申浩)도 왔다.

 

) 가장(假將)은 조선 시대 전시에 어느 장수의 자리가 빌 경우, 주장(主將)의 명령에 따라 임시로 그 자리를 대신하던 장수.

 

23(무자/ 35)

 

맑다.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寶城) 군수 김득광(金得光)이 오지 못한 게 한탄스럽다. 동쪽 상방(上房)에 앉아 순천 부사, 낙안 군수, 광양 현감과 의논하고 약조했다.

 

이날 영남(嶺南)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김호걸(金浩乞)과 나장(羅將) 김수남(金水男) 등이 명부에 있던 격군 80여 명에게 뇌물을 받고 도망갔다고 보고하며 붙잡아 오지 않았다.

 

이상히 생각하여 군관 이봉수(李鳳壽)와 정사립(鄭思立) 등을 몰래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니 김호걸과 김수남의 보고가 거짓으로 밝혀졌다.

 

이봉수와 정사립이 잡아 온 격군 70여 명은 배에다 나누어 배치하고 동시에, 김호걸과 김수남 등에게 그날로 목을 베었다. 흑흑흑

 

저녁 8시경부터 비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해 냈다.

 

24(기축/ 36)

 

늦게야 개였다. 성 동쪽이 아홉 발이나 무너졌다. 객사를 거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오후 6시경부터 비가 몹시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바람 또한 사납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救護)하였다. 61)-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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