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기해/ 7월 9일)
맑다. 사량도(蛇梁島,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뒤쪽 바다(양지리 하도)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새웠다.
주) 사량도(蛇梁島)는 현재의 사량도로 특히 옥녀봉의 경치가 뛰어나,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다.
6월 2일(경자/ 7월 10일)
맑다. 아침에 출발해서 곧장 당포(唐浦,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어, 우리 배가 둘러싸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적선 중에 대선(大船) 1척은 크기가 우리 판옥선과 비슷했고 적선 위에 치장(治粧)된 누각의 높이는 2장(丈)가량이었으며 누각 위에 왜장이 높은 곳에 앉아 점잖은 척,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짧은 화살(片箭)과 대중(大中)의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비 오듯 마구 쏘자, 왜장이 화살에 맞아 누각에서 떨어졌고 이어 왜놈들이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우하하
우리 장졸들이 집중사격을 가하니 화살에 맞아 엎어져 넘어진 놈들의 수가 부지기수(不知基數)라 남김없이 모두 섬멸했다. 곧 왜의 대선(大船) 20여 척이 부산(釜山)에서 진을 치고 바다로 들어오다 우리 군사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도망쳐 개도(介島)로 들어갔다.
주) 개도(介島)는 사량(蛇粱)과 당포(唐浦) 사이에 있는 섬으로 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추도(楸島)
6월 3일(신축/ 7월 11일)
맑다. 아침에 다시 여러 장수들을 독려(督勵)하여 개도(介島)를 협공했으나 왜적은 이미 도망쳐 사방에 남은 적병이 하나도 없었다. 고성(固城) 등지로 가고자 했으나 아군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울분을 참고 머물러 밤을 지냈다.
주) <아군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울분을 참았다.> 이순신의 부하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월 4일(임인/ 7월 12일)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오기를 고대하면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차에 정오가 되자, 드디어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서 왔다.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서 뛰지 않은 이가 없었다.
군사들을 합치기로 약속을 명확하게 한 후에 착포량(鑿浦梁, 통영시 당동 鑿梁으로 현재 통영의 해저터널이 있는 곳)에서 밤을 지냈다.
6월 5일(계묘/ 7월 13일)
아침에 출항해서 고성 당항포(唐項浦)에 이르니, 왜적의 큰 배 1척이 판옥선과 같은데, 배 위에 누각이 높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서 중간 배 12척과 작은 배 20척을 거느렸다.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니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는 자의 숫자를 알 수 없었으며, 왜장의 모가지도 7급이나 베었다. 나머지 왜적들은 뭍으로 올라 달아나는데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59)-계속-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