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임신/ 6월 12일)
가랑비가 아침 내내 오다. 경상 우수사의 답장이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光陽) 현감과 흥양(興陽) 현감을 동시에 불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 분통을 터뜨렸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수군을 이끌고 오기로 약속했는데 방답(防踏)에 판옥선(板屋船)이 첩입군(疊入軍)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인 줄 알고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군관을 보내 알아보니 방답(防踏)의 배라 허탈했다. 조금 후 녹도(鹿島) 만호(萬戶) 정운(鄭運)이 알현을 청하기에 불러 알아보니 “우수사는 오지 않으며 왜적이 점차 경기도(京畿道)로 접근하여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다. 만약 경상 우수 군(軍)과 만날 시기를 놓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중위장(中衛將) 이순신(李純信)에게 내일 새벽에 떠나도록 하고 장계를 고쳐 올렸다. 왜적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여도(呂島) 수군(水軍) 황옥천(黃玉千)이 달아났다. 그의 집에서 찾아와 목을 베고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아 경계했다.
주) 첩입군(疊入軍)은 공동 지역의 군대, 방답(防踏) 진성(鎭城)은 여수시 돌산읍(突山邑) 군내리에 소재하며 전라좌수영 소속의 수군 기지로 여기서 거북선을 건조한 곳이라 전한다.
5월 4일(계유/ 6월 13일)
맑다. 먼동이 틀 때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彌助項)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右斥候) 김인영(金仁英)과 우부장(右部將) 김득광(金得光), 중부장(中部將) 어영담(魚泳潭)과 후부장(後部將) 정운(鄭運) 등은 오른쪽에서 개이도(介伊島)를 거쳐 들어가 수색하여 치게 했다.
나머지 대장선(大將船)은 평산포(平山浦), 상주포(尙州浦)를 지나 미조항(彌助項)으로 가게 하였다. 5월 5일부터 5월 28일까지 일기는 빠져있다.
주) 우척후(右斥候) 김인영(金仁英)은 고정일의 난중일기를, 김완(金完)은 <부산 아재의 역사 이야기, Blog. naver. com>의 난중일기를 인용했다. 어느 사람이 진실인지는 모르나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보았다.
5월 29일(무술/ 7월 8일)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음으로 여러 장수를 홀로 거느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露梁, 하동군 금남면 노량진)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 원균이 와 있었다.
적의 소재를 물으니 “지금 사천(泗川) 선창(船滄)에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쫓아가니 왜놈들이 뭍으로 올라가서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아래 매어 놓았다. 항전 태세가 아주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해 일시에 돌격해서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여러 총통(銃筒)을 우레같이 쏘아대니 적들도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화살을 맞은 자는 헤아릴 수 없었고, 왜적의 수급도 많이 베었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과 사수(射手)와 격군(格軍)들도 탄환에 많이 맞았다.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했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왜선 13척을 불사르고 물러났다.
주) 사천선창(泗川船槍)은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사천 왜성 앞 바다로 추정), 2차 출정 첫 번째 해전지(海戰地)로 나대용과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평생 고생하였다. -58)-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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