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갑진/ 5월 25일)
맑다. 나라의 제삿날(성종비 공혜왕후 한 씨)이라 공무(公務)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別錄)을 써서 역졸을 시켜 급히 보냈다.
해 질 무렵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정박했다’는 영남 우수사 원균(元均, 1540~1597)의 통첩 과,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 1534~1593)의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釜山浦) 건너편에 도착했다’는 통첩이 동시에 올라와 곧장 임금께 급히 보고하고,
아울러 순찰사(전라 순찰사 이 광), 병사(전라 병사 최 원), 우수사(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있는 곳에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 관찰사(김 수)의 공문도 왔는데 또한 같았다. 주)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하는 긴박한 순간이다.
4월 16일(을사/ 5월 26일)
밤 10시쯤(二更) ‘거진(巨鎭)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영남 우수사(원 균)의 공문이 왔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장 장계를 올리고, 삼도(三道, 전라 순찰사. 전라 병사. 전라 우수사)에 공문을 보냈다.
주) 거진(巨鎭)은 첨사(僉使)가 지휘하는 진(鎭)인데, 여기서는 다대포진(多大浦鎭)과 부산포진(釜山浦鎭)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다대포진의 첨사(僉使)는 윤흥신(尹興信, 1540~1592)이고, 부산포진의 첨사(僉使)는 정발(鄭撥, 1553~1592)이었다. 이 전투에서 두 첨사(僉使)는 머리에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전쟁은 경상도(부산) 쪽에서 먼저 일어났음을 알수 있다.
4월 17일(병오/ 5월 27일)
흐리고 비가 오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영남 우병사(右兵使) 김성일(金誠一)이 보낸 공문에 ‘왜적이 부산포의 성을 함락한 후에 그대로 머물면서 퇴각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늦게 활 5 순을 쏘았다. 잉번(仍番, 상번) 수군과 분번(奔番, 하번) 수군이 잇달아 방비처(防備處)에 모였다.
4월 18일(정미/ 5월 28일)
아침에 흐리다. 이른 아침부터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발포(鉢浦) 권관(權管)이 이미 파직되었으니 대리 장수를 정해서 보내라’는 순찰사(이 광)의 공문이 도착했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거북선 제작에 공이 큰 군관, 나주에 생가와 묘소가 있다)을 곧바로 정해서 보냈다.
미시(未時, 오후1시부터 3시까지)에 ‘동래<東萊, 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도 함락되었고, 양산<梁山, 군수 조영규(趙英珪), 1535~1592)과 울산<蔚山, 군수 이언함(李彦諴) 두 군수도 조방장(助防將)으로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패했다’는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원통하고 분함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경상(慶尙) 좌(左) 병사(兵使, 이 각)와 경상(慶尙) 우(右) 수사(水使, 박 홍)들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갑자기 회군했다고 하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병방(兵房, 지방 육방의 하나)이 석보창(石堡倉, 사적 제523호로 지정된 석보(石堡)로, 여수시 봉계동 석창)에 머물고 있으면서 군사를 넘겨주지 않았기에 잡아 와서 가두었다.
주) 이 전투에서 조영규와 송상현은 전사함. 그러나 이언함(李彦諴)의 행적은 묘연하다. 도망갔다는 설과 포로가 되어 조선 조정에 올린 장계를 왜군에게 넘겨주고 풀려났다는 설도 있다.
4월 19일( 무신/ 5월 29일)
맑다. 아침에 품방(品防)에 해자 파는 일로 군관을 정해 보냈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役事)를 직접 독려했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芬赴軍, 입대하러 온 군사) 700명을 만나 점고하고 공사를 점검했다.
주) 품방(品防)은 성 밖으로 해자(垓子) 외에 방형의 구덩이를 파서 방어하는 시설, 상격대(上隔臺)는 성 위에 여장(女墻) 사이의 드문드문 지은 숨구멍, 널빤지로 짓고 총구멍을 뚫어 놓은 곳이니 당시는 총보다는 활을 쏘는 군사들을 방어할 목적으로 판자를 설치하는 구멍을 말함. -5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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