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죽으리라 결심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꼭 살리라 마음먹고 싸우면 죽을 것이다- 아산 현충사 광장에 서 있는 비석.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다. 즉 자살이냐? 은둔이냐? 논란의 중심에는 이순신이 총을 어느 부위에 맞았느냐와 이순신 사후에 누가 기함(旗艦)을 지휘했는가가 문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징비록(懲毖錄)》에는 총알이 이순신의 가슴을 관통했다고 했고,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총알이 이순신의 왼쪽 겨드랑이로 날아들었다고 기록했고,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또 의병장이던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에는 송희립이 갑옷과 투구에 총알을 맞으며 먼저 기절하자, 이에 놀란 이순신이 일어서는 찰나 겨드랑이 밑에 총알을 맞았다는 기록이다.
지휘에 대한 기록도 제각각이다. 이순신의 큰 형님의 아들, 이분(李芬)이 썼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는 이순신이 사망하자 조카 완과 아들 회가 대장선을 지휘했다고 나온다. 반면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손문옥이라는 사람이 옷으로 이순신의 시체를 가린 뒤 북을 울리며 싸움을 지휘했다고 기록하였다.
손문옥은 의문의 인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손문옥을 이순신에게 보낸 사람이 선조였고, 그래서 손문옥이 이순신을 죽였다는 ‘선조의 이순신 암살설’의 주장도 있다.
이처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당일의 기록이 제각각인 것이 자살설이나 은둔설이 대두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었고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노량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아니었다면 이순신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전쟁도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량해전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실패로 끝나서 퇴각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단순히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 일으킨 전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나라를 잃고 이민족에게 지배당할 뻔한 역사적 수치스러움을 개인의 능력과 헌신으로 막아내었다. 그는 분명 조선을 살린 것이 맞다. 그렇지만 조선의 미래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못난 위정자들이 자기반성을 하기는커녕, 흔들리는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관념적인 성리학(性理學)에만 집착하여 세계사적인 흐름을 외면하였다.
또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쟁을 도와준 명나라를 더욱 숭상하게 되었고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혜, 명나라가 우리 조선을 구해 줌)의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는 명분에 치우치다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당했다.
명나라가 우리를 도운 것은 단순한 의리가 아니라 자기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계산된 행위였음을 역사는 알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교에는 의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국익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위정자들은 명심할 일이다.
또한 이순신이 일본 역사에 끼친 영향도 크다. 이순신과 조명연합군이 시마즈 등 일본의 연합 함대와 노량 바다에서 뒤엉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순천왜성에서 고니시는 몰래 도망을 쳤다. 이는 자신을 구해주려 온 아군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고니시는 훗날 일본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고니시의 휘하 장수들조차 실망했을 정도이니 고니시를 따르는 세력의 이탈이 상당했다. 노량에서 이순신에게 혼이 난 시마즈는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그 피해는 막대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아들 히데요리 (1593~1615)를 받들었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던 동군이 일본의 패권을 놓고 싸웠던 세키가하라 전투(1600)가 한창이었다. 이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면서 에도 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45)-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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