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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43

서평

by 웅석봉1 2024. 6. 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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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은 간척된 상태지만 당시에는 만의 형태로, 바닷길이 깊숙하게 패인 지형이었다. 어둠을 헤치며 정신없이 도망가는 일본군 눈에는 영락없이 바다로 보였을 것이다. 길 없는 길을 보고 당황한 일부 왜군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함선을 버리고 육지로 기어 올라갔다.

 

그런가 하면 일부는 남해도에 내리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배를 돌려 조선 수군에게 돌격해 오기도 했다. 섬에 갇혀 있어 봐야 나중에 구해주러 올 아군도 없을 테니 죽기 살기로 조선함대를 뚫고 바다로 돌아 나가냐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순신으로서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장군의 명령에 따라 전 함대가 힘차게 북을 치고 포를 쏘면서 일본군이 몰려들어 밀집해 있던 관음포 쪽으로 달려 나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본군의 함대도 거칠게 저항했다. 그들은 관음포에서 빠져나오며 자신들을 향해 선두에서 공격해 오는 조선의 기함을 향해 수백 발의 조총을 발사했다. 조준 사격이었다.

 

이순신의 기함을 향해 수십 발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항상 이순신의 옆을 지키던 송희립이 먼저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희립아!” 총탄에 맞은 부하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에 또 한방 이순신도 총에 맞았다. 어흑흑

 

아들 이희가 지휘대로 달려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조카 이완 역시 이순신에게 달려왔다. 아들과 조카가 오열했다. 이순신은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싸움이 급하니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15981119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노량의 전투는 날이 밝고도 계속되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바다는 고요해졌다. 도망갈 수 있는 일본군은 도망갔고 그러지 못한 그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바다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함선뿐이었다. 일본군 500여 척의 연합 함대는 바닷속으로 침몰했거나, 비어 있거나, 부서진 채로 관음포에 처박혀 있었다.

 

노량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집요하게 공격한 조선 수군은 적선 200여 척을 불태우고 100여 척을 나포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너무 컸다.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출전했던 일본의 연합 함대 500여 척 중 부산으로 살아 도망간 함선은 50여 척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대 승이었다.

 

조명연합군은 노량에서 일본 함대를 상대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노량해전을 노량 대첩이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는 이순신만이 아니었다. 나주 목사 남유(南瑜, 1552~1598), 낙안 군수 방덕룡(方德龍, 1561~1598)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1563~1598) 통제영 우후(虞候, 절도사를 보좌하는 副職) 이몽구(李夢龜) 홍양 현감 고득장, 초계 군수 이언량 등이 목숨을 잃었다. 또 송희립과 나대용 등도 큰 부상을 당했다.

 

노량해전(23, 1598. 11.19. 이순신 사망, 등자룡 사망, 아군 피해판옥선 4척 침몰, 명군 전함 29척 침몰, 조선군 300여 명 전사, 명군 2,800여 명 전사. 일본군 피해전함 200여 척 침몰, 150여 척 반파, 100여 척 나포, 1만 명 사망) -43)-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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