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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40

서평

by 웅석봉1 2024. 5. 30.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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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3대 대첩으로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일 것이고,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는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7.8.)과 권율의 행주대첩(1593.2.12.), 김시민의 진주성대첩(1592.10.6.)이라 할 것이요,

 

그리고 이순신 개인사로 치면 3대 대첩으로는 한산도대첩(1592.7.8.)과 명량대첩(1597.9.16.) 그리고 노량해전(1598.11.19.)이라 할 것이다.

 

노량해전은 조선의 침략전쟁에 실패하고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이순신이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길을 막고 벌인 전투였고, 전투 규모만 따지자면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합친 것보다 컸으며, 임진왜란 사를 뛰어넘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꼼꼼하게 객관적인 기록을 남겼다. 수하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기록하는 한편 이름도 없는 노비 출신이 공을 세워도 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노량해전의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기지 못했다. 흑흑흑

 

가토가 지키는 울산왜성의 일본군들은 조선 수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시마즈가 지키는 사천 왜성의 일본군도 부산을 거쳐서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순천왜성의 고니시는 이순신과 진린의 함대에 틀어 막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고니시는 안달이 났고, 드디어 명나라 사령관 유정에게 연락을 취했다. 협상하자는 제안이었다. “장군, 우리가 곧 순천왜성을 비우고 일본으로 돌아갈 터이니 그때 우리의 퇴로를 막거나 뒤에서 공격하지 말기 바라오

 

이에 명나라의 유정은 묻는다. “그래서 나에게 무슨 선물을 주겠소?” 그래서 고니시가 답한다. “순천왜성을 장군에게 고이 바치겠소.” “군량미와 일본의 무기들도 모두 그대로 두고 가겠소

 

그래?, 그러면 일본군의 협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든 유정은 고맙기도 했다. 이때 고니시는 이것을 담보할 무엇을 내 노아라면서 이렇게 요구하였다. “대신, 명군 측도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뭔가 보여주시오그러자 유정은 명나라 군인 40명을 인질로 보냈고, 고니시는 그제야 안심했다.

 

다음날, 순천왜성에서 출병하려던 고니시는 앞 바다를 보고 분노했다. 순천왜성 앞에 조명연합군의 함대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화가 난 고니시가 인질로 잡혀 있던 명나라 군인들의 손을 잘라서 유정에게 보냈다. “장군,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소?”

 

그러자 유정이 변명했다. “나는 명나라 육군 사령관이오, 수군의 진린 장군은 나의 수하가 아니오. 내가 진린에게 이래라저래라하고 명령할 위치가 아니오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니시는 진린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고 협상에 성공하여 약속대로 순천왜성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이 바다는 조선의 바다였고 이순신의 바다였다. 조선의 함대는 혹시나 모를 고니시 부대가 도망갈 것에 대비하여 포위망을 풀지 않고 있었다. 이때 고니시의 선발대 10여 척은 왜성을 나와 속도를 높이고 달아나니, 조선의 함대는 이를 보고 가만 둘리 없었고, 이어 함포 사격을 가해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몰살시켰다.

 

결국 고니시는 바다에서 저승사자를 만난 듯 도망쳐서 다시 순천왜성으로 돌아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니시는 진린에게 따졌다. 진린은 아주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순신이 내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내가 말릴 권한도 없지 않은가?”

 

열을 받을 대로 받은 고니시는 마지막 싸움을 결심하고 창신도에서 만나기로 한 사위, 소 요시토시와 아직 사천 왜성에 남아 있던 시마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과 합세하여 조선 수군을 뚫고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소 요시토시와 시마즈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가는 일본의 첩보 선을 명나라 함대가 보고도 못 본 척 길을 터주었다. 고니시가 진린에게 준 뇌물의 효과도 있었고 진린의 자국 병사 사랑도 있었으리라.

 

늦게나마 조선 수군은 일본의 첩보 선을 발견하고 우리 함대보다 빠른 일본의 첩보선 인지라 사력을 다하여 쫓아 한산도에서 간신히 따라잡았고, 일본군은 배를 버린 채 한산도에 기어올라 시마즈에게 고니시의 도움 서신을 전달했다. -40)-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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