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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6

서평

by 웅석봉1 2024. 3. 3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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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이 도망쳐 온 노량해협은 거의 전라좌수영의 앞바다나 다름이 없었다. 왜선이 출몰했다는 사천 역시 바로 근방이었다. 전라좌수영으로서는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고뇌의 시간 들 속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수군이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에 다다르자, 이순신은 곧바로 해상 훈련을 전개하였다.

 

거북선까지 포함한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이었다. 그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거나 투덜대지 않았다. 강한 훈련만이 자신들의 살길임을 전 수군들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 이순신이 출정을 결심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고문격인 정걸(1514~1597)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 걸은 당시 70대 후반 고령의 장수였다. 당시 직책은 전라좌수영의 조방장(助防將)이지만, 실제 이순신의 고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이순신보다 30여 년 군대 선배로 전라도 좌수사와 경상 우수사를 이미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정걸 장군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정걸 장군은 여든의 나이에도 나랏일에 충성을 다하려고 아직도 진중에 있습니다. 이분에게 은사를 내리신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크게 감동할 것입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 정걸 장군을 충청 수사로 천거하였다.

 

이순신은 정걸에게 거북선 1척과 몇 척의 판옥선을 맡기며 다음과 같이 정중히 부탁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출정한 후, 적이 우회하여 여수로 들이닥치면 장군께서는 저희에게 연락을 취하시고 최대한 시간을 끌며 버텨주십시오. 그리고 전라우수영의 군대가 여수에 도착하면 경상도 바다에서 합류할 수 있도록 전라 우수사 이억기를 설득하여 주십시오.”

 

이후 노익장 정걸 장군은 충청도 수군을 이끌고 한강으로 들어가 권율(1537~1599) 장군에게 화살을 보급하여 행주대첩 승리에 크게 도왔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고흥으로 내려갈 때 선조는 유생들을 딸려 보내며 위로하였다.

 

또한, 정걸의 아들 정연은 영광 군수로 근무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고, 그의 손자 정흥록 역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전장에 나가 전사하는 등 정걸 장군 집안은 대대로 충직(忠直)한 가문이었다.

 

각설하고, 2차 출정에 나선 장수들은 중위장(中衛將)에 순천 부사 권준(당시 전라좌수영의 2인 자로 문관 출신이지만 용맹한 장수), 중부장(中副將)에 광양 현감 어영담(전라도와 경상도의 물길을 잘 아는 노장으로 훗날 2차 당항포해전의 영웅), 후부장(後副將)에 흥양 현감 배흥립, 좌부장(左副將)에 신호, 우부장(右副將)에 김득광,

 

좌측 후장(後將)에 녹도 만호 정운(이순신이 크게 의지한 용장), 우측 후장(後將)에 사도 첨사 김완, 좌별도장에 우후 이몽구, 우별도장 여도 권관 김인영, 한후장 전 권관 이응하, 그리고 이순신의 군관들인 변존서, 나대용(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송희립(이순신 옆에서 그림자 역할을 한 군관) 등이었다.

 

전라좌수영의 함대가 노량 해협에 다다르자 기다리던 원균이 판옥선 3척을 이끌고 합류하여, 두 함대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다는 사천을 향해 나아갔다. 이때 일본 전함 13척이 정박해 있다는 척후선의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육지에서는 왜성(사천 선진리성, 船津里城)을 만드는 중이었다.

 

일본군은 사천의 왜성을 축조하면서 근처 바다의 물길을 충분히 조사하였고, 판옥선이 쉽사리 공격해 들어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조선과 일본의 함대는 자혜리와 주문리 사이 바다에서 오랜 시간 대치하였다. -6)-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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