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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5

서평

by 웅석봉1 2024. 3. 2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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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신원사 일주문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 함대는 거제도 영등포 쪽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또다시 바다에서 신기전(神機箭)이 쏘아 올려졌다. 척후병으로 앞서간 포작선이 일본의 전함들을 발견하고 보낸 신호였다.

 

싸움에 지쳐있던 병사들이었지만 눈앞의 적을 놓칠 수는 없었다. 격군을 독려해서 가까이 다가가니 합포(진해 학개 혹은 마산만 근처) 근방에 일본 함선 5척이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조선함대에 막혀 도망갈 데가 없으니, 육지로 도망치려는 참이었다.

 

이순신은 옥포에서와 같이 판옥선 옆구리에서 포가 불을 뿜었고, 일본군은 전함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을 갔고, 이순신은 버리고 간 전함 5척을 모두 불태웠다. 옥포에 이어 합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합포해전>이라 하였다. (합포해전 2, 159257, 전함 5척 침몰, 490여 명 사망)

 

합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 함대는 남포(마산항 초입)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고성 쪽 적진포에서 일본 함선 13척을 만났는데 일본군들은 마을로 올라가 약탈에 정신이 없었다. 우리 군사를 보고도 전열이 정비가 어려웠던 일본군은 산속으로 도망을 쳤다. (적진포 해전 3, 159258, 전함 11척 침몰, 2,840명 사망)

 

3연승을 거둔 전라좌수영 수군들은 큰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이는 이후 이어지는 전투들에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음은 물론이었다. 이순신은 옥포해전을 포함한 1차 출정의 승전보를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2)로 승진시켰다.

 

이순신이 올린 승전보를 보자.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7일 새벽에 다 같이 출발하여 정오에 옥포 앞 바다에 이르니, 척후(斥候) () 김완과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올려 변고를 알리므로 적선이 있은 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단단히 타일러기를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정중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고 지시한 후……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 참조.-

 

*1967년부터 매년 55일부터 3일간 여수에서는 거북선을 찬양하고, 이순신과 전라좌수영 수군들이 1차 출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날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 이름하여 진남제(鎭南祭, 남쪽 바다를 제압한 축제)라 하였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지만, 이순신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육지의 전장 소식들은 실로 참담하였다. 특히 한양을 내어주었다는 소리는 믿기 어려웠다. 임금님도 어디로 몸을 피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때의 육지 상황을 살펴보면, 대마도를 출발한 일본군은 413일 부산포를 점령한 후 제1(가토 기요마사)경주를 거쳐, 428일에는 충주를 치고(신립 장군 패배), 북으로 올라와 53일에는 드디어 한성까지 함락시켰다. 이후 개성. 안변. 삼수. 길주. 회령까지 치고 올라갔다.

 

2(고니시 유키나가)425일에는 상주를 치고(이일 장군 패배), 충주를 거쳐 53일 한성을 치고, 개성을 거쳐 613일 평양을 함락시켰으며, 3(구로다 나가마사)청주를 치고, 한성. 개성. 평양으로 치고 올라왔다.

 

이때 선조는 한성이 함락되자 개성을 지나 평양. 안주. 영변. 박천. 정주. 선천. 용천을 거쳐 622일에 의주에 도착하였다. <이를 선조의 의주(義州) 파천(播遷) 또는 몽진(蒙塵)이라 함, 몽진의 원래 뜻은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씀> 이때 선조는 의주의 행재소에서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흑흑흑.

 

1차 출정 승리 이후 이순신은 고민과 번뇌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패배의 설욕을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군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다음 전투에 출전할 예정인 거북선은 과연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던 중에 여수와 가까운 경상우도 쪽에서 일본군이 자주 출몰한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본영인 여수를 비워두고 다시 경상도로 출정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전라우수영의 이억기에게 사람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전라우수영 병력이 여수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527일에 경상 우수사 원균이 지원을 요청해 왔다. ‘10여 척의 왜선이 사천 쪽에 나타나 노량 해협까지 후퇴하였으니 지원 바람요지다.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5)-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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