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언젠가 당신이 말한 그 비가 소록소록 내리고 있어. 명주실 같은 늦은 봄비가. 이 비를 맞으면서 당신이 나에게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한 그 말.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증오로 가득 차리라는 그 말.
‘당신. 저를, 용서해 주세요’란 그 말을 나는 은선이 엄마의 목소리로 지금 듣고 있어. 당신이 맞았던 그 비를 지금 나 혼자 맞으면서……
은선이 엄마, 그녀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왜 그녀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당신의 그 말을 나에게 하는 걸까. 내가 그녀에게 해야 할 그 말을, 그 말을 왜 그녀와 당신이 동시에 나에게 하는 걸까.
그녀와 당신은 결국 같은 사람이었던가. 그런데 왜, 그녀의 타는 가슴은 보이지 않는데 당신의 타는 가슴은 선명한 건가. 가슴 한복판에 이글거리는 숯불을 올려놓은 듯 타는 당신의 모습, 아……, 차라리 그 모습이 당신이 아니라 나이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던가.
사랑하는 당신,
당신과 나 사이는 사랑보다 더한 무엇이 있었어. 그것은 진화였어. 그 진화는 바로 사랑이 인생 위에서 놀다가 그 사랑이 인생의 놀이가 되는 진화였어. 그것이 당신과의 만남이 나에게 가져다준 의미이고, 그것이 나를 떠나가도록 한 원인이고 또한 그것이 당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한 이유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어.
그것은 우리의 원죄를 넘은 존재가 되었어. 이제 우리의 원죄, 이것으로부터 떠나와야 해. 우리의 악마를 이제는 버려야 하는 거야. 우리가 처음 만난 그해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의 원죄를 흘려보냈듯이 잊어버려야 해.
사랑하는 당신.
세상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티끌보다 가벼운 이념을 버리지 못해 수십 년을 차디찬 감방에서 한세상을 보내는 사람들. 저기 끝에는 분명한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곧장 걸어가는 사람들. 나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대열에서 길을 걸을 뿐이야.
설사, 그럴 리야 없겠지만, 당신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나의 운명은 이미 출발을 시작했어. 다시 모든 준비는 끝났어. 인생은 짧고 소설은 길다던가. 인생은 길고 사랑은 짧다던가. 그러나 나는 인생도 사랑도 길이가 같았으면 좋겠어.
적어도 당신과 나의 사랑만이라도……남자는 마지막 사랑을, 여자는 첫사랑을 원한다는 누군가의 그 말이, 나의 말이고 당신의 말이기를 나는 믿고 있어.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듯이 나는 언제나 내 운명보다는 당신의 운명을 더 기뻐하면서 당신을 기다리겠소. 사랑하는 당신이여, 안녕.
당신의 어리석은 사람이.
*이 소설의 원형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요, 서영은 (1943~현재)의 「먼 그대」(1983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요, 김채원(1946~현재)의 「겨울의 환(幻)」(1989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이라 할만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구독자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끝). 원고지 매수 51매. 7)-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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