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업 등록하기 전에 중앙협회에 보증 제도에 가입하였으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중개사의 보증제도는 중개의뢰인을 위한 보증제도이지 중개사를 위한 제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지인>이 중개사고를 낸 부동산이란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고, 내가 사무실을 자주 비우는 일이 생기니, 성실하던 실장도 버티기가 민망하다며 출근하지 않는다.
<천지인>은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나도 창숙이와 같이 도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도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앙협회에서 고문변호사도 선임하고, 창숙이 아파트에 가처분(假處分)도 해 주었다.
사고의 원인을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 크다. 창숙이가 아파트를 팔아 달라던 그날, 창숙이 보고 너네, 남편하고 의논했냐고 물었을 때, 창숙이 표정이 좀 이상했었다.
그때 내가 남편 전화번호를 물어 확인했더라면,……, 그뿐 아니다. 계약하기 전에 매수인과 아파트 현장을 확인했을 때, 출타 중이라는 창숙이 남편과 통화라도 했더라면, 아쉽다 못해 괴롭다.
문제는 본인확인에 있었다. 은행에 근무할 때 생명처럼 생각한 본인확인을 여기서는 왜 그렇게 엉성하게 했는지 통탄할 노릇이었다. 영원한 초짜라는 자괴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죽고 싶다는 말이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창숙이 남편은 천안에 있는 중소기업에 기술적 자문을 하고, 소액의 자문료를 받으며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크게 넉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한테 손 벌릴 정도는 아니고, 강남에 조그만 아파트 한 채 있는 것 월세 받고, 국민연금 받아 생활하고 있다. 소위 중산층이었다.
창숙이 남편, 김 부장과 나는 피해자지만, 둘 다 책임이 있다. 그는 남편으로서 가정을 소홀히 한 잘못이 있고, 나는 공인중개사로서 당사자 확인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이 그것이리라.
며칠 후, 어느 날 밤에 실패한 사나이끼리 대취하였다. 김 부장도 울고 나도 울었다. 믿지 못할 건 여자의 마음인 것을 왜 잊었던가.
내가 창숙이를 나쁜 년이라고 욕을 하자, 김 부장은 화를 냈다. 왜 남의 여자를 욕하느냐고. 술김에 두 사람이 멱살을 잡기도 하고, 부둥켜 뒤엉키기도 했다.
다음 날, 변호사 사무실에서 김 부장과 나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김 부장도 매매대금을 받고 아파트를 넘기기로 하고 나도 아내의 허락을 받아 부동산사무소 보증금을 그에게 주기로 하였다.
그는 나에게 몹시 미안해했다. 언젠가 창숙이가 돌아오면 그 돈 도로 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나갔다.
그다음 날 점심때 원수사에서는 <천지인> 가족을 위한 조촐한 송별연이 베풀어졌다. 초짜에 대한 위로의 말이 용장과 강졸의 입에서 무심히 흘러나왔다.
그리고 노을이 짙어질 무렵, <천지인 공인중개사 사무소>의 간판은 서서히 땅 위로 내려졌다. 15)-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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