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에 대하여
맹자는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사망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니 83세까지 살았다. 현대인 같으면 백수를 더 누린 셈이다.
그러나 맹자는 살아 있을 때는 추앙받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지 1500년이 지난 12세기 남송 시대에 와서야 유학자들은 『맹자』를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하나로 편입시켰고, 성리학의 대가 주자(1130~1200 朱子 朱熹)가 주해(註解)를 썼다. 맹자는 그제야 비로소 공자의 뒤를 이어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로 사서(四書)에 수록된 전문(全文)이 『대학』은 1,753자, 『중용』은 3,568자, 『논어』는 1만 5,917자, 『맹자』는 3만 5,374자로 『맹자』가 압도적이다. 한편 학문을 함에 있어 읽는 순서를 중시했는데 우선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順)으로 읽으라고 주자는 강조했다.
그 이유는 『대학』을 읽어 규모를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 근본을 세우고, 다음에 『맹자』를 읽어 발월(發越 이상주의적인)을 보고, 다음에 『중용』을 읽고 고인의 미묘한(형이상학적인) 부분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맹자』는 일곱 편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만년에 그가 고향에서 제자들과 나눈 담론(談論)의 기록이고, 내용 면에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추)」, 「등문공(騰文公)」에 등장하는 맹자는 정치가 또는 현실 참여형 지식인으로서 왕도 정치론과 역성 혁명론, 국가론, 사회 정책론을 역설하였고,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 네 편에서는 철학자 맹자를 만날 수 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 선과 악, 군자의 도리, 인생관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강조한다. 여기서 맹자는 공자의 제자임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겠다.
실제로 맹자는 공자(BC551~479) 사후 100여 년이 지나서 태어나 어렸을 때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공자의 고향 <곡부>와 맹자의 고향 <추성>까지의 거리는 25km 정도라고 한다.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주나라를 중상했다. 주나라는 사회적 위계가 분명한 봉건국가였다.
공자와 맹자는 춘추전국의 대혼란을 종식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주나라 시절의 규범과 법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믿었다. 공자는 문화와 교육의 힘을 깊이 신뢰했다. 그런데 맹자는 공자보다 더 멀리 나갔다. 맹자는 공자보다 훨씬 명료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다른 사상과도 격렬하게 투쟁한 논쟁적 지식인이었다.
맹자는 왕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형벌과 조세를 경감하고 무역을 장려하며 부모 잃은 아이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 국가와 군주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생활을 안정시켜야 민심을 얻을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힘으로 통치하는 패도(覇道)를 버리고 인의(仁義)로 다스리는 왕도 정치를 따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맹자는 공동체의 질서를 중시하였다. 전국시대 대혼란을 몸소 겪은 지식인으로서 당연한 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는 공동체 질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사상과 단호하게 투쟁하였다.
「보수가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청춘의 독서』 <웅진 지식 하우스> 간행 유시민 지음 130쪽에서 131쪽 인용.
1) 그래서 나도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맹자』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公孫추章句下 1장 1절」
「孟子 曰 天時不如地利요 地利不如人和니라 三里之城과 七里之郭을 環而攻之而不勝하나니 夫環而攻之에 必有得天時者矣언마는 然而不勝者는 是天時不如地利也니라 城非不高也며 池非不深也며 兵革이 非不堅利也며 米粟이 非不多也로대 委而去之하나니 是地利不如人和也니라.」 *瑍 포위 환, 矣 의조사 의, 池 못 지, 革 갑옷 혁, 粟 곡식 속, 委 버릴 위. 是 옳을 시.
직역하면, 맹자가 말하였다.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만 못하다. 3리 되는 성과 7리 되는 곽을 포위 공격하여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포위 공격하면 반드시 천시를 얻을 때가 있겠지만,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이는 천시가 지리만 못한 것이다.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못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병기와 갑옷이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쌀과 곡식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이것을 버리고 떠나가니, 이는 지리가 인화만 못 한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교 문화연구소가 옮긴 유교 경전 번역서 2 『맹자』 232쪽에서 233쪽 인용.
2) 젊은 시절 맹자의 위 구절을 즐겨 읽었으며, 현직 시절에 특히 인화를 강조하였다.
3) 어설픈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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