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김삿갓》 186
여인(女人)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울음 섞인 음성(音聲)으로 호소(呼訴)하듯 말한다.
<김(金) 향수(鄕首)는 명색(名色)이 영감님일 뿐이지, 저한테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 양반(兩班)이 처음부터 싫었지만, 오라버니의 명령(命令)을 거역(拒逆)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들어갔던 거예요,>
<싫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일이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하오?>
김삿갓은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의식적(意識的)으로 꾸짖어 보였다. 그러자 여인(女人)은 어깨가 들먹거리도록 울어 쌓다가, 문득 이렇게 대답(對答)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철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삿갓 선생을 알고 나서부터 제 생각이 근본적(根本的)으로 달라졌어요,>
<생각이 근본적(根本的)으로 달라지다니,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김삿갓은 그렇게 반문(反問)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인(女人)의 등을 정답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인은 김삿갓의 팔을 두 손으로 힘주어 움켜잡으며 이렇게 대답(對答)하는 것이었다.
<철이 없을, 때에는 돈만 많으면 인생(人生)을 얼마든지 행복(幸福)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정작 그 처지(處地)가 되고 보니 인생이란 돈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은 옳게 생각했구료, 인생(人生)이란 어디 돈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건가요?>
<저는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체면불고(體面不顧)하고 이렇게 삿갓 선생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에요,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언젠가는 삿갓 선생(先生)님을 반드시 찾아왔을 거예요,>
봉녀(奉女)는 그렇게 호소하며 김삿갓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이 제아무리 도덕군자(道德君子)이기로, 여인의 유혹(誘惑)을 물리쳐 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의식(無意識)중에 여인의 몸을 힘차게 끌어당기니, 여인은 고대(苦待)하고, 있은 것처럼 전신(全身)을 송두리째 내맡기며 접근(接近)해 오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오랫동안 금욕(禁慾) 생활을 해오던 처지(處地)인지라, 굶주린 호랑이가 살찐 암캐에게 덤벼들 듯 사정없이 덤벼들었다.
여인도 오랫동안 애욕(愛慾)에 굶주려 온 듯, 사나이의 포옹(抱擁)을 뜨겁게 뜨겁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여인의 몸을 완전히 점령(占領)하고 있는 어느 순간, 문득 다음과 같은 의혹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나는 지금 무봉(無縫)의 흉악(凶惡)한 음모(陰謀)에 걸려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런 의혹(疑惑)에 구애(拘礙)되어 여인을 멀리, 하기에는 눈앞의 향락(享樂)이 너무도 황홀(恍惚)하였다.
봉녀(奉女)도 오빠를 닮았는지 정력(精力)이 왕성(旺盛)한 편이어서, 애욕(愛慾)의 향락(享樂)은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이윽고 멀리서 새벽, 닭 소리가 들려오자, 봉녀는 그제야 자기 정신(精神)으로 돌아왔는지 이불 속에서 일어나 앉으며 무척 아쉬운 어조(語調)로 말한다.
<날이 밝아 와요, 누가 보기 전에 저는 돌아가야겠어요,>
알고도 남을 만한 소리다.
<남의 눈에 띄기 전에 빨리 돌아가시오,>
<제가 돌아가고 나거든 한잠 더 주무세요, 있다가 오라버니께서도 무슨 말씀이, 계시겠지만, 오늘 밤이나 내일 저녁이나 형편(形便) 보아서 또 들르겠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全身)에 소름이 쭉 끼쳤다.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무봉의 음흉(陰凶)한 음모(陰謀)에 걸려들었음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어서려는 봉녀(奉女)의 치맛자락을 부랴부랴 움켜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가기 전에 말 좀 물어봅시다,>
봉녀(奉女)는 하룻밤 사이에 정(情)이 들었는지, 김삿갓의 어깨를 이불로 감싸 주며 스스럼없이 말한다.
<고단하실 텐데 주무시지 않고 무슨 말씀을 물어보시려고 그러세요,>
김삿갓은 봉녀가 과부(寡婦)가 되어라도 그녀와 결혼(結婚)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의 사주(使嗾)를 받고 이불 속으로 침입(侵入)해 왔는지, 배후(背後)의 인물만은 분명히 알아두고 싶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봉녀(奉女)가 안심하고 입을 열도록 하려는 고등(高等) 술책(術策)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봉녀는 자못 행복(幸福)스러운 듯 명랑(明朗)하게 웃는다.
《정비석(鄭飛石) 풍류소설(風流小說) 《소설 김삿갓》 (제2권), 144쪽~147쪽-계속-(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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