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갑신/ 5월 5일)
나라의 제삿날(세종 비 소헌 왕후 심 씨 제사)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우후(虞候)(이몽구)가 수색을 마치고 탈 없이 돌아왔다.
순찰사(이 광)와 도사(都事)의 답서를 송희립(宋希立, 1553~1623, 이순신의 핵심 참모)이 함께 가지고 왔다.
순찰사 서찰의 내용 중 “영남(嶺南) 관찰사(觀察使) 김수(金睟, 1547~1615)가 받은 서신에서 말하기를‘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 답신에서 일찍이 배 한 척을 보냈는데, 만약에 귀국(貴國, 조선)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이는 필시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진 것이다’라고 하나 그 말은 음흉한 거짓말이다.
동래(東萊)에서 서로 바라다보는 바다이기에 그와 같을 리가 만무하나, 말을 이와 같이 꾸며 속이려는 간사한 꾀를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주) 대마도주 요시토시(宗義智)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로 많은 전투에 참전한 인물이다. 서계(書契)는 조선 정부가 일본 정부 또는 특정인에게 통교(通交)를 허락하는 신임장(信任狀).
3월 25일(을유/ 5월 6일)
맑으나 바람이 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10 순을 쏘았다. 경상병사(慶尙兵使, 김성일, 金誠一, 1538~1593)가 평산포(平山浦, 남해군 남면 평산리)에 도착하지 않고 곧장 남해현(南海縣)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는 뜻으로 답장을 보냈다. 새로 쌓은 성을 살펴보니 남쪽이 9파(把)가량 무너져 파괴되어 있었다.
주) 당시 남해 현령(南海縣令)은 기효근(奇孝謹, 1542~1597)이었다. 파(把)는 길이의 단위로 다섯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감싸질 정도가 1파이니, 9파는 어느 정도 길이인지를 가름할 수 있겠다.
3월 26일(병술/ 5월 7일)
맑다. 虞候(이몽구)와 송희립이 남해로 갔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활 15 순(巡)을 쏘았다.
3월 27일(정해/ 5월 8일)
맑고 바람조차 없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배를 타고 소포(昭浦)에 나가 쇠사슬을 가로질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나무 기둥 세우는 일을 바라보았다. 아울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3월 28일(무자/ 5월 9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활 10 순(巡)을 쏘았는데, 5 순은 모조라 다 맞고 2 순은 4번 맞고 3 순은 3번 맞았다.
주) 활 10 순은 총 50발이니, 그중에 5 순은 모두 맞았으니 25발이요, 2 순은 4번 맞았고, 3 순은 3번 맞았으니, 모두 25발, 4발, 3발이니 합이 32발이다.
3월 29일(기축/ 5월 10일)
맑다. 나라 제삿날(세조 비 정희왕후 윤 씨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산 고향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羅將)이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니 정말로 다행이다.
주) 이순신은 수시로 아산의 어머님 안부를 물으니 효자인 것은 확실하다. -5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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