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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54

서평

by 웅석봉1 2024. 6. 2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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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현충사 경내의 공사중 안내문(관람로 보수정비 공사기간 24년 5월 13일~ 24년 7월 1일)

 

324(갑신/ 55)

 

나라의 제삿날(세종 비 소헌 왕후 심 씨 제사)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우후(虞候)(이몽구)가 수색을 마치고 탈 없이 돌아왔다.

 

순찰사(이 광)와 도사(都事)의 답서를 송희립(宋希立, 1553~1623, 이순신의 핵심 참모)이 함께 가지고 왔다.

 

순찰사 서찰의 내용 중 영남(嶺南) 관찰사(觀察使) 김수(金睟, 1547~1615)가 받은 서신에서 말하기를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 답신에서 일찍이 배 한 척을 보냈는데, 만약에 귀국(貴國, 조선)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이는 필시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진 것이다라고 하나 그 말은 음흉한 거짓말이다.

 

동래(東萊)에서 서로 바라다보는 바다이기에 그와 같을 리가 만무하나, 말을 이와 같이 꾸며 속이려는 간사한 꾀를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 대마도주 요시토시(宗義智)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로 많은 전투에 참전한 인물이다. 서계(書契)는 조선 정부가 일본 정부 또는 특정인에게 통교(通交)를 허락하는 신임장(信任狀).

 

325(을유/ 56)

 

맑으나 바람이 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 10 순을 쏘았다. 경상병사(慶尙兵使, 김성일, 金誠一, 1538~1593)가 평산포(平山浦, 남해군 남면 평산리)에 도착하지 않고 곧장 남해현(南海縣)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는 뜻으로 답장을 보냈다. 새로 쌓은 성을 살펴보니 남쪽이 9()가량 무너져 파괴되어 있었다.

 

) 당시 남해 현령(南海縣令)은 기효근(奇孝謹, 1542~1597)이었다. ()는 길이의 단위로 다섯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감싸질 정도가 1파이니, 9파는 어느 정도 길이인지를 가름할 수 있겠다.

 

326(병술/ 57)

 

맑다. 虞候(이몽구)와 송희립이 남해로 갔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활 15 ()을 쏘았다.

 

327(정해/ 58)

 

맑고 바람조차 없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배를 타고 소포(昭浦)에 나가 쇠사슬을 가로질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나무 기둥 세우는 일을 바라보았다. 아울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328(무자/ 59)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10 ()을 쏘았는데, 5 순은 모조라 다 맞고 2 순은 4번 맞고 3 순은 3번 맞았다.

 

) 10 순은 총 50발이니, 그중에 5 순은 모두 맞았으니 25발이요, 2 순은 4번 맞았고, 3 순은 3번 맞았으니, 모두 25, 4, 3발이니 합이 32발이다.

 

329(기축/ 510)

 

맑다. 나라 제삿날(세조 비 정희왕후 윤 씨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산 고향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羅將)이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니 정말로 다행이다.

 

) 이순신은 수시로 아산의 어머님 안부를 물으니 효자인 것은 확실하다. -5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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