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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39

서평

by 웅석봉1 2024. 5. 2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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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성산일촐봉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병력은 10만여 명이었고, 조선군도 3만여 명의 정예군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군도 35천여 명이 넘었다. 히데요시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말았다.

 

병력과 사기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조명연합군은 남해안의 왜성들을 공격하기로 하고 남해안에 있는 20여 개의 왜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위협적인 대상은 가토가 지키고 있는 울산왜성, ‘시마즈가 지키고 있는 사천 왜성, ‘고니시가 지키고 있는 순천왜성 등 세 곳의 성이었다.

 

당시 명나라 경리(총사령관) 양호(楊鎬, 1555~1629)와 병부상서 형개(邢玠)는 병력을 4개로 쪼개어 동시에 왜성 세 곳을 공격하기로 했다.

 

울산왜성은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 1543~1618)가 조선의 선거이(宣居怡, 1545~1598)와 김응서(金應瑞, ?~1624)의 손을 잡고 공격하였다. 성을 지키던 가토는 자결 직전까지 몰리면서 고전했지만 끝내 수성에 성공했다.

 

사천 왜성은 명나라 동일원(童一元, 생몰연대 미상)과 조선의 정기룡(鄭起龍, 1562~1622, 하동 출신, 하동에는 그의 기념사업회를 결성, 매년 기림)이 함께 공격했으나, ‘시마즈에게 당해 내기는 어려웠다.

 

15989월과 10월 사이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 육군의 3개 군과 수군이 함께 공격)의 일환으로 울산왜성과 사천 왜성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했다.

 

남아 있는 마지막 한 곳은 고니시가 지키고 있는 순천왜성이었다.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 1558~1619)과 조선의 권율이 서로군을 형성하여 육지로 순천왜성을 공격하기로 하였고, 명나라 제독 진린과 조선의 이순신이 남로군을 형성하여 바다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군을 대표하는 선봉장이었다. 그는 부산성전투. 동래성전투. 탄금대전투. 한양 점령, 그리고 평양까지 점령하여 조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인물이다. 조선 조정은 고니시가 있던 순천왜성만큼은 꼭 점령하여 그의 목을 취하고 싶었다.

 

순천왜성은 왜교성(倭橋城) 또는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불린다. 북쪽, 동쪽, 남쪽 삼면은 완전히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육지로 공격할 수 있는 경로는 서쪽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 조명연합군은 서쪽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 15천 병력이 수성하는 이 성()은 조명연합군 35천 병력이 공격해도 끄떡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게 공성(攻城)이었다.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데는 또 하나 커다란 골칫거리가 있었으니 해안 일대가 썰물 때면 갯벌이 보일 정도로 조석 간만의 차가 크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순천왜성을 해상에서 공격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다에서 공략하던 명나라 함대 39척이 썰물에 갇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덩달아 조선의 판옥선 3척도 갯벌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왜성에 있던 일본군들이 쏟아져 나와 역공을 가해, 명나라 수군 800여 명이 죽었고 진린 등 장수들은 겨우 죽음은 면했다.

 

결과적으로 순천왜성 공격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장도(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됨)를 점령하고 30여 척의 일본 함대를 수장시켰고 위기에 처한 명나라군을 구해내었다. 조선 수군의 병력 손실도 거의 없었기에 이를 이순신의 패배라고 보기는 어렵다.

 

순천왜성에 정박해 있었던 300여 척의 함대가 이순신과 교전하기를 두려워하며 바다로 출전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의 참전만으로 이순신은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로병진책은 실패로 끝났다. 13만 병력을 넷으로 나누는 결정은 어리석었다.

 

13만 병력을 모아서 일시에 순천왜성을 공격했더라면 능히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고니시 유키나가를 고립시킬 수 있었고 부산까지 압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명나라군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싸우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없었고, 일본군이 물러나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이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었으니, 그는 패배자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병사들과는 달리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고이 섬나라로 돌려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순천왜성 전투(1598. 9.20~10.4, 적군 피해전함 30척 침몰, 11척 나포, 3,000여 명 사망, 아군 피해명나라 전함 39척 침몰, 조명연합군 800명 사망) -39)-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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