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난중일기> 11

서평

by 웅석봉1 2024. 4. 14. 16:00

본문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을 좇아 나오며 당항포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들의 뒤쪽에 매복한 이억기의 함대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억기의 함대를 확인한 순간 그들의 표정은 엉망이 되었다.

 

일본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바다 위에서 징 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조선군은 장사진으로 후퇴하는 일본군을 덮쳤다. 일본 함선인 세키부네(關船, 아타케부네보다 작은 전투함)나 안택선은 속도는 빨랐지만, 제자리 회전이 불가능하였기에, 일본 수군들 입장에서 후퇴하던 조선 수군에게 이렇게 에워싸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앞뒤로 조선의 수군에게 포위된 것을 알게 된 왜장 모리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이순신과 이억기의 쌍 학익진은 포위된 일본 함대를 향해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북선 용머리에서 포가 발사되었으니, 안택선은 층루가 부서지고, 곧이어 왜장은 안택선의 파편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65일 당항포에서는 26척의 일본 함대 중 25척이 격침되었다. 음력으로 65일이면 양력으로 7월이라 바닷물이 따뜻한 시기이리라.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함선이 침몰하자 너도나도 바다에 뛰어들었고 필사적으로 육지를 향해 헤엄쳤다.

 

헤엄치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군의 화살 세례가 퍼부어졌다. 일본군의 전함 1척만 남기고 모두 수장되었고,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유유히 당항포를 빠져나왔다.

 

당항포에도 어둠이 밀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녘, 살아남은 1척의 배에 올라탄 100여 명의 일본군들이 당항포 해협을 몰래 빠져나왔다. 그러나 매복한 조선의 수군이 이들을 가만 둘리 없었다. 이순신의 함대에서 함포가 불을 뿜었으며, 일본군들은 바다로 뛰어들었고, 일부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20대 젊은 장수가 끝까지 저항했으나 갑옷에 10개 이상의 화살이 박힌 채 큰 비명 소리와 함께 바다로 빠졌다. 젊은 지휘관의 시신을 건져내어서, 방답 첨사(防 踏 僉使) 무의공(武毅公) 이순신(李純信)이 직접 목을 베었다. (당항포해전, 6. 159265. 아군 피해, 13명 전사, 37명 부상. 적군 피해, 전선 26척 전파. 2,720명 사망.)

 

그러나 당항포해전을 마무리 과정에서 한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죽은 왜군의 수급(首級, 전쟁에서 얻은 적군의 머리)을 누군가가 베어 담았다. 원균 휘하의 군관들이었다. 이순신은 수급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수급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의 근거가 되어, 쌀 몇 가마니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순신이 조정에 베어 올린 수습보다 원균이 조정에 올려보낸 수급이 더 많은 촌극이 벌어졌다. 전쟁의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조정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판옥선의 숫자는 많았지만, 소극적인 전투를 한 것으로, 원균은 고작 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용맹스럽게 활약한 것으로 생각하는 조정 대신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순신의 척후선(斥候船)이 가덕도 근방에서 일본군의 탐색선(探索船)을 침몰시키자 경상우수영 군관이 나타나 수급을 빼앗아 갔다는 보고가 또 들어왔다. 이순신은 속으로는 분노했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척후선의 노고(勞苦)를 격려하며 병사들에게 술을 내어주었다.

 

당항포해전 이틀 후 67, 거제도 영등포에서 약탈하고 있는 일본 함대를 발견한 척후선에서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동풍이 심하게 불어왔지만, 조선함대는 역풍을 뚫고 일본 함대를 추격했다. 조선함대를 본 일본 함대는 가덕도 쪽으로 도망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군들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으면 무게 나가는 짐짝들은 바다에 버리면서 속도를 높이려 했다. 속도만 놓고 보면 판옥선이 일본 전함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풍이 너무 강하자 일본군 함대 7척은 남쪽으로 꺾어 거제도 율포 쪽으로 향했다. 율포에 도착하자 일본군들은 배를 버려둔 채 육지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전라좌수영의 우후(虞候,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의 외관직) 이몽구(李夢龜)는 적선을 나포했고, 녹도 만호(萬戶) 정운과 광양 현감 어영담의 판옥선은 나머지 배들을 불태웠다. 전라우수영의 가리포진(완도읍) 첨사(詹事) 구사직(具思稷)은 적선을 불태웠고 적을 수급을 베었다. 원균의 함대들은 어디선가 수급을 줍고 다니느라 율포해전을 놓쳤다.

 

율포해전에서 기분 좋게 승리한 이순신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왜인들의 목이 잘리고 혹은 빠져 죽어 남김없이 섬멸되니 장병들은 마음이 상쾌했다.’ 율포해전(7, 1592.6.7, 아군 피해, 13명 전사, 49명 부상, 일본군 피해, 전함 7, 500여 명 사망). -11) 계속-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중일기> 13  (1) 2024.04.21
<난중일기> 12  (1) 2024.04.17
<난중일기> 10  (1) 2024.04.13
<난중일기> 9  (1) 2024.04.12
<난중일기> 8  (3) 2024.04.09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