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놀이
오늘은 종지부(終止符)를 찍어야 해! 뭐, 놓아주겠다? 내 가정이 걱정된다?……, 네가 언제부터 내 가정을 걱정했던가. 어림없는 소리. 나를 속이려 들다니, 꽃뱀 같은 주제에. 돈푼이나 있는 젊은 건달 놈에게 물렸겠지. 내가 그동안 네년한테 공들인 정성이 얼만데! ㅎㅎㅎ
철영이는 청자가 보낸 문자에 이를 갈면서 그녀의 가게가 있는 쪽인 3번 출구를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섰다. 거리는 바람이 매섭고 진눈깨비까지 날려 눈을 찌르고 있다.
그렇게 쏟아지게 내리는 것은 아니어서인지, 우산 없이 걷는 사람들이 더 많다. 아니 그것보다는 갑자기 내리기 때문에 미리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마치 김철영 씨처럼.
아직 저녁 6시도 안 되었는데 겨울의 길목이라서 인지 어둠의 그늘이 깔리고 있다. 역의 남쪽에는 거리의 두목인 양, 희고 높은 건물 하나가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건물 오른쪽 벽에 세로로 큰 글씨 다섯 자가 붉고 또렷하게 박혀있다. 백화점이다.
건물에는 벌써 연말 특별사은 행사 <대바겐세일> 플래카드가 건물 전체를 거의 덮을 정도로 크게 입을 쩍 벌리고 걸려있다. 벌리고 있는 플래카드의 네 귀퉁이에는 푸른 불빛이 항구의 등대 눈처럼 환하다.
건물 주차장 입구에는 긴 모자를 쓰고 기다란 장화를 신고, 붉은 코드를 걸친 키가 장승 같은 젊은이 하나가 손에는 형광 막대를 들고, 입에는 호루라기를 불면서 들어오는 차들을 안내하고 있다. 매우 분주하다.
백화점 옆으로는 5층 미만의 고만고만한 상가 건물들이 바둑돌처럼 쭉 늘어서 있고 건물에서 돋아난 간판들이 마치 메뚜기 눈처럼 반짝거린다. 오늘따라 차들의 경적도 죽어 있다. 아마 내리는 진눈깨비에, 소리도 묻혀 땅으로 내려앉았나 보다.
거리는 금시라도 메뚜기 떼들이 튀어나와 푸른 들판을 건너 저 북쪽의 늙은 아파트촌을 휩쓸고 갈 것처럼……, 폭풍 전야에 물새들이 자리를 떠난 해변처럼… 고요하다.
그것은 동서로 난 큰 도로 북쪽의 공원 같은 오래된 아파트촌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아파트는 앙상한 가지들로 뺑 둘러 처져 있다. 아파트 입구에는 찢어진 플래카드 천들이 하늘에 걸려있는 연처럼 나무 사이사이에 박혀있다. 하도 오래되어 흰 천이 희색이 되었다.
<불안해 못 살겠다. 튼튼하게 다시 짓자!> <시장(市長)은 각성하라, 공약을 지켜라!> <국민 권리 못 지키는 국회는 죽었는가!> 아파트 동 사이의 희뿌연 가로등 불빛 속의 오래된 글씨들이 졸고 있다.
내리는 진눈깨비는 땅에 떨어지자마자 물로 변한다. 미끈거리는 도로 바닥에 한차례 휘청거린 철영이는 흐르는 콧물을 오른손 엄지로 오른쪽 콧구멍을 막고 팽하고 풀었다.
세월이 참 빠르다. 청자를 처음 만난 지도 11년이 되었다. 그날 호박나이트에 들어선 것이 밤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호박>은 철영이가 다니는 회사와 이웃하고 있어 그들의 단골 아지트다. 그날도 오늘처럼 초겨울이었다. 철영이 바바리코트를 입었으니까.
단골 웨이터가 철영이 일행에게 부킹(Booking, 예약. 장부 기장. 출연 계약 등이나 여기서는 모르는 사람들의 남남을 주선하는 사업? ) 시켜 준 팀이 30대 중반의 청자 일행이었다. 철영이의 단골 웨이터는 언제나 30대 이하만 주선시켜 준다. 그것은 철영이가 웨이터한테 특별 주문한 제일의 법칙이었다. 여자 40이 넘으면 냄새가 고약하다. 허허허
오징어 썩는 냄새도 아니고 하수구 냄새도 아닌 아무튼 역겨운 냄새에 영 기분을 잡친다. 그렇다고 그 집에서 20대는 천연기념물이라 철영이가 바라기에는 언감생심이었고, 말이 30대 중반이라지만 보기에 40이 넘지 않으면 오케이다.
실제 나이가 얼마인지는 누가 알리라. 하지만 철영은 언제나 40 이전을 주문했다. 그것은 여자 40이 넘으면 남새도 냄새이지만, 아마도 철영이 본인이 40대 중반이니 자기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아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사고의 발로였으리라.
당시 철영이 일행은 블루스는 졸업했고 지루박은 한 참 배우는 중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퇴근 후에 한 시간씩 지도교수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그리고 대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현장을 찾는다. 현장에서 한두 시간 움직이고 나면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그때 맥주 한잔하면 정말 시원하고 개운하다. 호호호
세상에는 춤 배우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데, 철영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춤은 스트레스를 푸는 건전한 오락이고 온몸 운동이라는 생각이 그의 지론이었다. 가령 두 시간을 춤을 추고 나면 1만 보를 걷게 되고 그러면, 아픈 허리 병의 치료 효과도 좋다는 사실이니, 건강이 입증된 셈이다. -2~1)-계속-
<춤 놀이> 2~2 (3) | 2024.04.03 |
---|---|
<청산에 살리라> 13 (1) | 2024.03.21 |
<청산에 살리라> 12 (3) | 2024.03.20 |
<청산에 살리라> 11 (3) | 2024.03.19 |
<청산에 살리라> 10 (3) | 2024.03.1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