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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139

서평

by 웅석봉1 2025. 4. 2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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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는 무슨 일을 할까?

 

입술에서 목 입구 부근까지 5cm가량을 후두(喉頭)라고 한다. 후두 주위는 몇 개의 연골(軟骨)이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목구멍의 중요한 역할인 목소리를 내는 성대(聲帶)가 있다.

 

성인 남성은 이 연골(軟骨) 일부가 목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이 부분을 흔히 울대뼈 혹은 결후(結喉)라고 한다. 보통 중학생 무렵 되면 울대뼈가 튀어나온다.

 

후두 입구에 있는 후두덮개는 음식물(飮食物)이 지날 때는 닫히고, 공기(空氣)를 들이마실 때는 열리는 구조다. 자동으로 음식과 공기가 제 갈 길을 가도록 교통(交通) 정리하는 똑똑한 기관이다. 공기가 지나는 기관으로 이어진 후두(喉頭)는 오로지 공기만 지날 수 있다. 사람의 목은 공기와 음식물이 동시에 통과할 수 없다.

 

과학 잡학사전 통조림 <인체 편>(지식을 쌓으려면 통째로 조목조목!) <엮은이 키즈나출판 편집부, 옮긴이 서수지, 감수 이경훈, 하라다 도모유키(原田知辛) (사람과 나무 사이, 2023)>, 121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108(임자/1119)

 

맑고 바람도 없다.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있는 적의 소굴로 가니, 적들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대의 위세만 보인 뒤에 흉도(胸島, 거제시 사등면)로 돌아왔다. 띠 풀 260()을 베고, 그대로 출항하여 한산도에 이르니, 밤은 벌써 자정이었다. 순천 부사가 돌아갔다.

 

109(계축/1120)

 

맑다. 아침에 정자로 내려오니 첨지 김경로(金敬老, ?~1597), 첨지 박종남(朴宗男, ?~1601), 조방장 김응함(金應緘), 조방장 한명련(韓明璉, ?~1624), 진주 목사 배설(裵楔, 1551~1599),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이 같이 와서 보고하고 다들 돌아갔는데, 김경로(金敬老)와 박종남(朴宗男)은 남아서 종일 활을 쏘았다.

 

박종남(朴宗男)은 청방(廳房, 구들을 놓지 않고 널을 깔아 만든 마루방)에서 춘복(春福)이와 같이 잤다. 김경로(金敬老)는 배로 내려가서 잤다. 남해 현령, 진주 목사, 김해 부사, 하동 현감, 사천 현감, 고성 현령이 보고하고 돌아갔다.

 

1) 김응함(金應緘)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이수일(李守一), 이시언(李時言), 정기룡(鄭起龍, 1562~1622) 등과 활동하고 1594년 통제영에 가서 助防將으로 군무를 도왔다. 명량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2) 배설(裵楔, 1551~1599)은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참전하였다. 15977월 부산의 왜선을 원균과 함께 급습했으나 전세가 不利하자 전선 10여 척을 이끌고 도주했다. 이순신이 복직된 후 배를 인계하고 떠났다.

 

3) 백사림(白士霖, ?~?)은 김해 부사로서 1594년 거제의 왜군을 공격하는 데 참전하고, 곽재우(郭再祐, 1552~1617), 권율(權慄, 1537~1599),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지원하였다.

 

1010(갑인/1121)

 

맑다. 아침에 나가서 장계 초고를 수정하였다. 박자윤(朴自胤)과 곤양 군수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 흥양(興陽) 현감(縣監), 보성 군수, 장흥 부사는 보고하고 돌아갔다. 이날 밤에 상서로운 꿈을 두 가지나 꾸었다. 아들 울(), 존서(存緖), 유헌(有憲), 정립(廷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011(을묘/1122)

 

맑다. 몸이 불편하다. 충청 수사가 왔다. 공문을 처리하고 일찍 들어가서 쉬었다.

 

1012(병진/1123)

 

맑다. 아침에 장계 초안을 수정하였다. 느지막이 우수사와 충청 수사가 왔다. 경상 수사 원균(元均, 1540~1597)이 적을 토벌한 일을 스스로 장계를 올리겠다고 해서 공문을 작성해 가지고 와서 보였다.

 

비변사의 공문에 따르면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이 쥐 가죽으로 만든 남바위<이엄(耳俺), 귀 가리개>를 전라 좌도에 15, 전라 우도에 10, 경상도에 10, 충청도에 5개를 나누어 보내왔다.

 

) 쥐 가죽으로 만든 귀 가리개는 당하관(3~9) 문무 관리가 겨울에 바람막이나 보온용으로 사용하였다.

 

1013(정사/1124)

 

맑다. 아침에 아전을 불러서 장계 초안을 작성했다. 느지막이 충청 수사를 내보냈다. 본도의 우수사가 충청 수사를 만나러 왔는데 나를 보지 않고 돌아갔다. 이는 역시 많이 취했기 때문이다. 종사관 정경달(丁景達, ?~?)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천 1호선을 내어서 보냈다.

 

1014(무오/1125)

 

맑다.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하면서 육혈총통(六穴銃筒) 5자루와 환도(環刀)를 바치는데, 그 말을 전하는 자는 김서신(金書信)이라고 했으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

 

1015(기미/1126)

 

맑다. 박춘양(朴春陽)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39-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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