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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35

서평

by 웅석봉1 2024. 5. 2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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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시마의 선발대가 불리한 상황임에도 당시 적군의 중군 장이던 와키자카는 위기에 빠진 구루시마를 돕지 않았다.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던 공포감이 다시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중군(中軍)의 후퇴를 명령하고 말았다.

 

명량에서 살아남은 구루시마 함대와 후방의 적군 함대 300여 척은 공포에 질린 채 무질서하게 도망쳤으며, 후퇴하면서 난파된 함선이 더 많은 지경이었다.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1556~1630)는 부상(負傷),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파견한 중앙 감찰관 모리 다카마사(1559~1628)는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익사 직전에 겨우 구조되었다.

 

적군의 함대 300여 척의 망신스러운 대패였다. 명량해전은 가장 이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승으로 마무리 지은 전투였다. 울돌목의 양측 언덕에서 손에 땀을 쥐며 이 전투를 바라보고 응원했던 해남의 백성들은 얼싸안으며 승리의 함성을 외쳤다. “이겼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1597916일 명량에서는 일본군 전함 31척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1척에 100명만 탑승했다고 계산해도 도 합 3,000여 명이 적군이 바다에 빠진 셈이다. 판옥선에 기어오르다가 죽거나 조선의 함포 공격과 활에 맞아 죽은 일본군도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여기저기 부서지고 훼손되어 당장 전투가 불가능한 함선도 100여 척이 넘었다. 기적과도 같은 엄청난 승리였다.

 

정유재란을 일으켜 남원을 점령하고 전주마저 집어삼켰던 일본군은 천안에서 명나라 육군과 대치하면서 수군이 서해로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건만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끝내 서해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결국 보급의 차질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전쟁의 양상은 180도로 바꿔놓고 말았다.

 

명량해전 이전에도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었는데 이 해전으로 이순신은 거룩한 최고의 영웅 즉 성웅(聖雄)이 되었다. 이성웅은 명량해전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명량의 승리는 실로 천운(天運)이었다.”

 

명량대첩(21, 1597.9.16. 적군 피해구루시마 미치후사 사망, 도도 다카토라 부상, 적선 31척 침몰, 92척 난파, 3,000여 명 사망. 아군 피해11명 전사, 21명 부상)

 

한편, 일본군은 명량해전에서 패하고 그 분풀이를 이순신의 가족에게 대신했다. 이순신의 본가와 아산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李葂, 1577~1597)이 전사했다.

 

-아들 면은 고향 집에 있다가 적의 한 부대를 상대로 적장 셋을 죽이고 본인 또한 죽으니 당시 총각이라 참으로 충무의 아들이라 할 것이다. -정조 때 정승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말이다.

 

이순신은 국가는 보호했지만 자기 가족은 지키지 못했다. 셋째 아들은 담력이 있고 활도 잘 쏘는 등 무인의 기질이 특출한 아들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이 셋째는 이순신에게는 특별한 아들이었다. 당시 아들의 비보를 듣고 쓴 일기를 보자.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찧어지는 것 같다. 중략-<난중일기 15971014>

 

이순신도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하룻밤으로 치유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가 어디 이순신뿐이겠는가.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이틀 후의 일기를 보자.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난중일기 15971016>

 

15979월 명량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은 서해를 타고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 그는 왜 적을 피하듯 서해로 올라갔을까?

 

우리 수군은 명량에서 사력을 다했다. 그래서 병사들의 휴식이 필요했고, 한편으로 화약(火藥)과 염초(焰焇)도 다시 확보해야 했다. 적선의 선발대 133척을 격파했지만, 아직도 적군은 수백 척의 함대가 건재해 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이순신은 작전상 후퇴한 것이다. 그러나 적군은 이순신을 쫓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명량에서의 패전으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이순신이란 장수가 두렵지 한량없었다. 일본군은 스스로 수륙병진 작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35)-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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