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은 답했다.
“내가 왜 판옥선의 행방을 당신에게 말해야 하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순신은 아직 복권 전이라 배설의 상관이 아니라는 뜻 아닐까? 아니면 아마 일본전에 참패하고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아무튼 배설이란 인물은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어딘가 숨어 버렸다. 이후 전국에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찾지 못하다가 1599년 선산에서 권율 장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 참형되었다.
이어서 이순신은 곡성에서 방향을 틀어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서 정철 총통을 만들었던 정사준(鄭思竣, 1553~1599)을 재회했다. 얼싸안고 또 울었다. 이순신은 화포 제작에 관한 모든 일을 정사준과 정사립 형제에게 맡겠다. 또 승병장 혜희(𣒎喜, 생몰 연대 미상)를 비롯한 승병들을 만나니 이순신에게는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순신은 순천을 떠나 보성으로 들어섰다. 저녁에 보성 조양창(兆陽倉, 보성군 조성, 양곡 창고)에서 상당량의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너무나 기뻤다. 또, 칠천량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송희립(宋希立, 1553~1623)을 다시 만났다.
‘좌정운 우희립’이란 말이 있듯이 송희립은 항상 이순신의 옆에서 그의 수족 역할을 했던 군관이었다. 또한, 칠천량 해전 이후 이순신을 만나 패전 경위를 설명했던 거제 현령 안위(1563~1644)가 보성으로 찾아와 합류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영 시절부터 이순신과 함께 근무했던 이몽구(李夢龜)도 이순신을 찾아왔다, 반갑고 기쁘지만,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부터 쳤다. 이몽구가 전라좌수영 소유였던 군량미를 불태우지도, 그렇다고 챙겨 오지도 못한 범실을 그냥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갑기도 하였지만, 지엄한 군령을 이순신도 어쩌지 못했다.
이순신이 장수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선조의 교지가 내려왔다. 교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 이순신은 억장이 무너졌다. 왜군이 서해를 돌아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간다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그리고 육군이 수군에 합류한다고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이순신은 교지를 받은 다음 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전선의 수는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戰船離募 微臣不死則 不敢悔我矣)”
임금의 교지를 받은 후 항명에 가까운 정계를 써 올려보내야 했던 이순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장계를 올려 보낸 이순신은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반면 이와 같은 이순신의 장계를 받아본 선조도 기가 막혔다. “이순신 이자가 또 왕명을 거역하는구나.”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경상 우수사의 배설은 그때야 이순신에게 숨겨둔 판옥선 12척의 위치를 고했다. 이순신은 배설에게 명했다. “장흥 군영 구미(龜尾, 지형이 거북과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쪽으로 판옥선과 함께 오시오”
배설은 답했다. “제가 뱃멀미 탓에 몸이 힘듭니다.” 수군 제독이 뱃멀미 핑계를 대었다니, 기가 찰 일이다. 배설은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몸져누워 있던 이순신은 판옥선을 회수하기 위하여 장흥의 군영 구미에서 나룻배를 타고 직접 회룡포까지 갔다. 그리고 장흥 회룡포에 정박해 있던 12척의 판옥선을 접수하고, 장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임금의 교서를 보이며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조촐하게 거행했다. -30)-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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