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40)

단편소설

by 웅석봉1 2023. 4. 21. 09:28

본문

"아 그건 말이야 너의 어머니는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하신 거야. 수감생활이 30년이 넘었잖아. 삶에 도를 통하신 거지. 그리고 생각해봐, 아는 것이 병이 될 때가 있어. 그리고 안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지. 이미 쏟아 버린 물이야. 오히려 여태까지의 질서에 혼선만 생기지 않을까."

 

P와 나는 나의 일은 그쯤 끝내고 동창들의 근황과 세상 사는 이야기로 정초의 하룻저녁을 흘려보냈다. 다음 날 사우나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시리고 아픈 과거를 또 한 번 가슴에 묻어 버리고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날씨는 맑았고 하늘은 높았다. 봄이 오는 소리가 저 멀리 남쪽에서 들려온다.

 

12

 

설이 내일이다. 엄마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 우리는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설날에 엄마가 오실지도 모른다. 아마 오실 것이다. 아내와 나는 차례 음식을 예년보다 몇 가지를 추가하였다. 엄마가 좋아하신다는 은갈치와 가오리도 큰놈으로 두 마리씩 샀다.

 

특히 가오리는 할머님도 좋아하셨다. 정초의 가오리 한 마리는 피가 한 말이라 하셨던가. 년 초부터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날씨가 풀렸다. 나른한 오후에 택배 하나가 배달되었다. 고모님이 보낸 듬직한 손가방이다. 할머님이 돌아가실 때 엄마가 혹시 석방이라도 되면 돌려주라는 아버님 가방이란다. 나는 포장을 풀었다. 반들반들 손때가 묻은 까만 가죽제품이다.

 

가방을 열어보니 아버지가 쓴 영농일지 같은 대학노트 다섯 권, 어린이 공책 세 권 그리고 조그만 보자기에 싼 간난 아기 저고리 한 개가 들어 있다. 혹시나 돈이나 문서 같은 것은 없는지 살펴보았으나 그것뿐이었다. 그 가방을 잘 닦아 책상 위에 두었다. 내일 차례 지낼 때 차례상 앞에 놓을 계획이다. 아버님의 유품으로 모시고 싶었다.

 

그날 밤 아내와 나는 아파트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다. 혹시 엄마가 오실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핸드폰도 집 전화기도 수십 차례 보았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설날 아침이 되었다.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례를 지내고 우리 가족끼리 말없이 아침을 먹었다.

 

차례상을 정리하고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꿈결에 엄마가 우리 집 현관을 조용히 들어오신다. 하얀 고무신을 신으시고, 남색 치마에 노란색 저고리를 입으셨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