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망운당 건립 발원문> 3~1

웅석봉1 2025. 6. 23. 11:24

망운당(望雲堂) 건립 발원문(發願文)

 

-중략-

 

20081231일 자로 평생직장인 농협(農協)에서 퇴직(退職)하고 보니 살길이 막막(寞寞)하였다. 다행히 이듬해 3월에 직장의 주선(周旋)으로 굴지(屈指)의 비료회사에 사외이사(社外理事)로 선임(選任)되어 2년을 더 근무할 수 있었다.

 

사외이사는 매일 출근(出勤)하지는 않으나,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 이사회(理事會)에 참석하여 의결(議決)하는 직위(職位)이다. 그럭저럭 2년간의 화려(?)한 사외이사직(社外理事職)을 끝내고 나니, 할 일 없이 방황(彷徨)하는 나그네 신세(身世)가 되었다.

 

그러고는 덧없는 세월(歲月)이 좀 더 흘렀다. 앞으로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아가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정했다. 그때가 20124월 초의 일이니, 은퇴(隱退)하고 33개월 후의 일이었다.

 

거꾸로 가는 짓거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차차 고민(苦悶)하고, 어디서 살아야 할까부터 결정(決定)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영원(永遠)히 살아야 할 곳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그냥 서울에서 살아도 되지만 서울은 싫었다. 우선 공기가 혼탁(混濁)하고, 인심(人心)도 야박(野薄)하고, 교통도 지옥(地獄)이다. 나는 공기도 향긋하고, 인심도 후하고, 교통도 편리한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니 서울은 내가 살아야 할 곳이 아니었다. 그런 조건들을 생각하며 내가 살아야 할 곳을 심사숙고(深思熟考)하니, 산골에서의 전원생활(田園生活)이 희망(希望)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 곳을 찾아 경기도(京畿道), 강원도(江原道)로 충청도(忠淸道)로 전국을 다녀보았으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고향의 지인들께 인사(人事)도 할 겸해서 겸사겸사(兼事兼事) 고향에 내려갔다.

 

고향(故鄕)은 언제나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고 그리운 곳이다. 고향에 와보니 정말 좋은 곳이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좋은 곳은 다름 아닌 연전(年前)에 부산(釜山)에서 사는 막내 여동생이 집을 지으려고 사놓은 논()이었다. 총 부지(敷地)568, 집 두 채를 짓고도 여유(餘裕)가 있는 땅이었다.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峯)이 바로 쳐다보이는 멋진 곳이었다.

 

마을에서 약간 위쪽에 있었는데, 앞에는 작은 연못까지 있으니 말 그대로 배산임수(背山臨水). 이곳이 내가 영원(永遠)히 살 곳이라는 생각에 몸까지 달아올랐다.

 

그래서 즉석에서 여동생과 계약(契約)했다. 텃밭도 챙길 겸 해서 200평만을 계약했다. 200평을 초과(超過)하면 세금(稅金) 문제로 관공서(官公署)를 들락거릴 수 있겠다는 나름의 계산(計算)도 없지는 않았다.

 

그길로 서울로 올라와 정든 아파트를 매각(賣却)했다(20124). 내가 서울에 처음 올라온 1998년 봄부터 15년 동안 목동(木洞)에서만 살았던 정든 지역(地域)을 떠나려니 시원섭섭하였다. 하긴 정()이란 뭔지!

 

나는 1998년 산청(山淸)을 떠나서 처음으로 서울로 전입하였다. 그때 목동(木洞) 12단지에 전세로 살다가 퇴직금(退職金) 중간 정산으로 14단지 아파트를 매입한 후에 그 아파트를 처분(處分)하고 7단지에 한 채를 사서 살고 있었다.

 

당시 불경기(不景氣)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너무 많이 올랐기 때문에 조정(調整) 국면(局面)인지는 모르지만, 가격(價格)이 상당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야 할 곳을 찾았으니, 시세(時勢)는 불문(不問)하고 처분(處分)할 수밖에 없었다. 1)-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