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 181

웅석봉1 2025. 6. 16. 14:15

음식을 먹고 나서 바로 달리면 왜 배가 아플까?

 

밥을 먹은 후에는 음식물(飮食物)을 소화하기 위해 위()와 장()에 평소보다 많은 혈액(血液)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때 격렬한 운동을 하면 근육(筋肉)으로 혈액이 집중되어 몸 전체의 혈액이 부족해진다.

 

몸 전체의 혈액이 부족(不足)해지면 우리 몸은 오래된 혈액 속의 적혈구(赤血球)를 분해하는 비장(脾臟)을 쥐어짜서 혈액을 공급한다. 비장이 수축(收縮)할 때 비장이 있는 왼쪽 배가 뒤틀리며 꼬이듯 아픈 느낌이 든다.

 

소화에 필요한 혈액이 부족해지면 위와 장이 경련(痙攣)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경련을 주위 신경이 통증(痛症)이라고 착각(錯覺)해 뇌()에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옆구리 주변으로 배가 뒤틀리듯 아프다. 빨리 달릴 때도 위에 고인 가스가 움직여 주위를 압박(壓迫)해 배가 아플 수 있다.

 

과학 잡학사전 통조림 <인체 편>(지식을 쌓으려면 통째로 조목조목!) <엮은이 키즈나출판 편집부, 옮긴이 서수지, 감수 이경훈, 하라다 도모유키(原田知辛) (사람과 나무 사이, 2023)>, 163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111(무인/28)

 

맑다. 하늬바람(서풍)이 밤새도록 거세게 불어 한겨울보다 갑절이나 더 춥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저녁나절에 거제 현령 안위(安衛, 1563~?)가 왔다. 그는 경상 수사 권준(權俊)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상세히 말했다. 광양 현감이 들어왔다.

 

112(기묘/29)

 

맑았으나 하늬바람(서풍)이 강하게 부니 추위도 배로 매서웠다. 새벽 2시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느 낯선 장소에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 다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서로 우국충정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가슴속에 품은 속내를 토로했다.

 

얼마 후 비바람이 거세게 치는데도 흩어지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 만일에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은 어디로 가시겠는가를 되풀이하며 걱정하다가 말할 바를 알지 못했다.

 

예전에 영의정이 천식을 심하게 앓는다고 들었는데 잘 나았는지 모르겠다. 척자(擲字) 점을 쳐보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여풍기랑(如風起浪)’이라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을지 점을 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은 것과 같다. 여빈득보(如貧得寶)’라고 했다. 이 괘는 매우 길하다.

 

어제저녁에 종, ()을 본영으로 내보냈는데 바람이 몹시 거세어 걱정되었다. 늦게 나가서 공무를 보며 각지로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낙안 군수가 들어왔다. 웅천 현감의 보고에 왜선 14척이 와서 거제의 금이포(金伊浦, 금포)에 정박했다라고 하기에 경상 수사에게 삼도(三道)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 보도록 명하였다.

 

) 서쪽의 적은 중국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근거지를 둔 누르하치의 여진족을 가리킨다.

 

113(경진/210)

 

맑다. 아침에 경상 수사가 와서 견내량으로 나간다고 보고하고 떠났다. 느지막이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고 체찰사에게 올리는 공문도 보냈다. 성균관의 노비는 유생이 다시 성균관의 학문을 세운다라는 글귀를 가지고 온 사람인데, 고하고 돌아갔다.

 

이날 바람이 잠잠하고 따뜻하였다. 저녁 달빛이 낮처럼 환하고 바람도 한 점 없었다. 홀로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신홍수(申弘壽)를 불러 피리 소리를 들으며 밤 10시경 잠이 들었다.

 

1) 성균관 진사 이욱(李稶) 등이 상소하기를 난리 이후 5년 동안 선성(先聖)께 한 번도 예를 올리지 않으시니 한심합니다. 신들은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시서(詩書)를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조실록(1596517)

 

2) 신홍수(申弘壽, 1567~1619)는 이순신의 휘하에서 옥포와 노량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군자감 주부와 훈련원장을 지냈다. 병신년(丙申年)에 진영(陣營)으로 오고 피리를 잘 불었다.

 

114(신사/211)

 

맑으나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저녁나절에야 바람이 잦아들며 날씨는 따뜻하다. 흥양(興陽) 현감이 들어왔다. 정사립(鄭思立)과 김대복(金大福)도 들어왔다. 조기(趙琦)와 김숙(金俶)도 함께 왔는데 그들에게서 연안(延安)에 있는 옥()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115(임오/212)

 

맑으나 따뜻하다. 새벽 3시쯤에 망궐례를 행했다. 아침에 낙안 군수와 흥양(興陽) 현감을 불러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느지막이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고, 투항해 온 왜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낙안(樂安)과 흥양(興陽)의 전선, 병기, 부속물과 사수와 격군들을 점검하니 낙안의 것이 가장 잘못됐다고 한다. 이날 저녁에 달빛이 매우 밝으니,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116(계미/213)

 

맑다. 서리가 눈처럼 내렸다. 저녁나절에 공무를 보았다. 아주 늦게 경상 수사와 우우후(右虞候) 등이 왔다. 웅천 현감도 와서 취하여 돌아갔다.

 

117(갑신/214)

 

맑다. 방답 첨사가 휴가를 받고서 변존서(卞存緖), 조카, (), 김숙(金橚) 등과 함께 배로 나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정오에 공무를 보았다. 우후(虞候)를 불러 활을 쏘는데 성윤문(成允文)과 변익성(邊翼星)이 와서 함께 쏘고 돌아갔다.

 

어두울 무렵 강대수(姜大壽) 등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와서종 금()16일에 본영에 도착했다라고 말했다. 종 경()은 돌아와서 말하기를아들 회()가 오늘 은진(恩津, 논산)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했다.

 

118(을유/215)

 

맑다. 아침부터 종일 군복을 마름질했다. 느지막이 곤양 군수와 사천 현감이 왔다가 취해서 돌아갔다. 동래 현령이 급히 보고하기를 왜놈들이 반역하려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유격장(遊擊將) 심유경(沈惟敬)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116일에 먼저 일본으로 돌아갔다라고 보고했다.

 

) 선조실록(159611)에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먼저 일본(나고야)에 들어갔다. 조칙을 맞을 절차를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었으나 그 속사정을 몰랐다고 하였다.

 

119(병술/216)

 

맑고 따뜻하다. 느지막이 나가 공무를 보았다. 사도 첨사와 여도 만호, 우후(虞候)와 곤양 군수, 경상 수사가 왔다. 우수사 우후(虞候)를 불러왔다. 곤양 군수가 술을 마련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부산의 적진에 들어갔었던 네 사람이 와서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 겐소(玄蘇)와 데라자와 마사나리, 고이니 히가 함께 116일 새벽에 바다를 건너갔다라고 전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양식 3 말을 주어서 보냈다. 이날 저녁에 박자방(朴自方)은 순찰사 서성(徐渻)이 진영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가지 물품들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오늘 메주를 쑤었다.

 

1) 겐소(玄蘇)는 일본 성복사(聖福寺)의 승려로 유키나가의 휘하 참모로 활동하고 강화(講和)할 때마다 참석하였다.

 

2) 데라자와 마사나리(寺澤正成, 1563~1633)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서 기장과 울산에서 기요마사 부대를 지휘하고 군량을 담당했으며, 명나라와 일본 간 협상에 참여하고 노량해전 때 참전했다.

 

3) 고니시 히(小西飛, 1550~1626)는 유키나가의 막료로서 15937월 왕자 송환 조건으로 조공을 요구하고 1594년 북경에 가서 봉공을 약속받은 후 귀국했다. 평양성 전투 때 계월향과의 전설이 있다.

 

4) 박자방(朴自方, 1579~1598)은 여수 출신으로 이순신의 조방장이 되어 고향의 편지를 전달하는 담당이었다.

 

120(정해/217)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피곤하여 잠시 낮잠을 잤다, 2시에 메주 만들기를 끝내고, 그것을 부뚜막에 들여놓았다. 낙안 군수가 와서 둔전(屯田)에서 거둔 벼를 가져왔다라고 고했다. -181-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