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138
●인두는 무슨 일을 할까?
목구멍은 코로 들어온 공기와 입으로 들어온 음식물을 분리한다. 목구멍의 뜻하는 한자 인(咽)과 후(喉)는 크게는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비강(鼻腔), 구강(口腔), 음식물을 위로 보내는 식도와 이어지는 인두(咽頭), 공기를 폐로 보내는 기관과 이어지는 후두(喉頭)를 아울러 목구멍이라고 한다.
외부와 몸속을 연결하는 목구멍은 공기와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인두에서는 기관(器官)과 식도(食道)가 교차한다. 음식물을 삼키면 인두(咽頭) 입구의 뚜껑이 자동으로 닫히고 음식물과 공기를 위로 내려보낸다.
인두에는 면역 작용을 하는 편도(扁桃)가 있어, 코와 입으로 들이마신 공기에 들어 있는 병원균(病原菌)이 기관과 폐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범죄나 체면에 어긋나는 일까지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살면서 때로는 경험하는 속담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가끔 있다.
『과학 잡학사전 통조림 <인체 편>』 (지식을 쌓으려면 통째로 조목조목!) <엮은이 키즈나출판 편집부, 옮긴이 서수지, 감수 이경훈, 하라다 도모유키(原田知辛) (사람과 나무 사이, 2023)>, 120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갑오년 10월(1594년 10월)
10월 1일(을사/11월 12일)
새벽에 출항하여 장문포(長門浦)에 도착하니 경상 우수사와 전라 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충청 수사와 여러 선봉의 장수들과 함께 곧장 영등포(永登浦)로 들어가니, 흉악한 왜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대어 놓고 항전하는 놈은 한 놈도 없었다.
해 질 무렵에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서 사도(蛇渡) 2호선이 뭍에 배를 매려 할 즈음에, 조그만 왜적의 배 한 척이 달려와서 불을 던지고 달아났다. 비록 불은 껐지만 매우 분하다.
전라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 군관들의 실수를 단단히 꾸짖고 넘어갔지만, 사도 군관들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다스렸다. 밤 10시경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주) 이날 영등포에서 왜적선들은 만났으나, 적들이 항전하지 않아 별다른 교전(交戰)은 없었다.
10월 2일(병오/11월 13일)
맑다. 선봉선(先鋒船) 30척으로 장문포에 있는 적의 정세를 알아 보고 오게 명했다.
10월 3일(정미/11월 14일)
맑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찍부터 장문포로 가서 하루 종일 싸우려고 했지만, 적은 두려워하며 항전하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10월 4일(무신/11월 15일)
맑다. 곽재우(郭再祐, 1552~1617), 김덕령(金德齡, 1567~1596) 등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백 명을 뽑아 뭍에 내려서 산으로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저녁나절에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호응하니, 적들은 갈팡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분서주하였다. 육군은 왜적 하나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그놈을 잡으려 배로 내려갔다.
해가 질 무렵에 칠천량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李繼明)이 표신(標信, 궁궐에 드나드는 허가증)과 선유교서(宣諭敎書, 임금의 가르침을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문서)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임금님이 하사하신 잘(표피 豹皮, 담비의 털가죽)도 있었다.
주1) 이날 2차 장문포 해전을 치렀다. 도원수 권율이 의령의 군사 8백여 명을 곽재우와 김덕령에게 보내고, 윤두수(尹斗壽, 1533~1601)의 140명 군사와 이일(李鎰, 1538~1601)의 210명의 군사를 육전에 지원했고, 수군과 합세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지체하는 바람에 교전하지는 못했다. 《선조실록》(1594년 10월 13일)
주2) 담비 가죽은 정3품 이상의 관리가 한겨울에 사용하는 귀 가리개(귀마개)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10월 5일(기유/11월 16일)
종일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칠천량(漆川梁)에 그대로 머물러 장계 초고(初考)를 고쳤다.
10월 6일(경술/11월 17일)
맑다. 일찍이 선봉을 장문포에 있는 적의 소굴로 보냈더니 왜놈들이 ‘일본은 명나라와 한창 평화협정을 맺자는 협의 중이니,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 ’는 패문(牌文)을 써서 땅에 꽂아 두었다.
왜놈 하나가 칠천도 산기슭에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 군수가 잡아 왔다. 물어보니 영등포에 있는 왜적이었다. 흉도(胸島, 거제시 사등면)로 진을 옮겼다.
10월 7일(신해/11월 18일)
맑고 따뜻하다. 병사 선거이(宣居怡, 1550~1598), 곽재우(郭再祐, 1552~1617), 김덕령(金德齡, 1567~1596) 등이 나갔다. 나는 그대로 머물렀다. 띠 풀 183동(同)을 베었다. -138-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