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127
●코는 어떻게 냄새를 맡을까?
콧속의 후각(嗅覺) 감각 세포가 냄새를 포착(捕捉)해서 뇌에 신호를 보낸다. 냄새 입자가 코에 들어가면 천장 부분의 <후각상피>라는 점막(粘膜)에 있는 500만 개의 후각 세포가 냄새 입자를 포착한다. 그 정보가 후각 신경에 전달되고 대뇌의 <후각 고랑>이라는 영역에 신호(信號)를 전송하면 마침내 냄새를 느낄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아닌지, 적이 다가오는지 아닌지 등 위험(危險)을 감지할 때 냄새는 중요한 정보다. 동물(動物)은 위험을 감지해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후각이 발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냄새를 계속 맡으면 코가 둔해지는 현상(現狀)은 새로운 냄새를 감지하기 위해서다.
사람이 맡을 수 있는 냄새는 2,000~3,000종으로 알려져 있다. 안전(安全)한지, 맛있는지 등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전에 맡은 냄새를 뇌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향수(香水) 조향사(調香士)는 1만 종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 잡학사전 통조림 <인체 편>』 (지식을 쌓으려면 통째로 조목조목!) <엮은이 키즈나출판 편집부, 옮긴이 서수지, 감수 이경훈, 하라다 도모유키(原田知辛) (사람과 나무 사이, 2023)>, 109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7월 13일(기축/8월 28일)
비가 내린다. 홀로 앉아 아들 면(葂, 3남)의 병세가 어떤지 척자점(擲字占)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뵙는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점괘가 나왔다. 매우 길하다. 다시 쳐보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如夜得燈)는 점괘가 나왔다, 두 점괘가 모두 길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또 유 재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과 같다(如海得船)는 점괘가 나왔다. 다시 쳐보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점괘가 나왔다. 이 또한 매우 길하다.
저녁 내내 비가 내렸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느지막이 송전(宋糋)이 돌아갈 때 소금 1곡(斛, 열 말)을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馬梁) 첨사(僉使)와 순천 부사가 왔다. 어두워지자 돌아갔다.
비가 내릴지 갤지를 점쳤더니 뱀이 독을 토해내는 것과 같다(如蛇吐毒)는 점괘가 나왔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듯하니 농사일이 매우 걱정된다. 밤에 비가 퍼붓는 듯이 내렸다. 저녁 8시쯤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서 돌아갔다.
7월 14일(경인/8월 29일)
비가 계속 내려 저녁부터는 삼대 같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겨우 밤을 지냈다. 점쳤던 결과가 그대로 나타나니 매우 신기하다. 충청 수사와 순천 부사를 불러서 장기를 두게 하고 그 구경에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가슴 속에는 무언가 찜찜하여 근심이 있으니 즐겁지는 못했다.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 수루 위로 걸어 올라서 이리저리 몇 바퀴 거닐다 돌아왔다. 탐후선이 오지 않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자정쯤에 비가 또 내렸다.
7월 15일(신묘/8월 30일)
비가 내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조카 해(荄)와 종 경(京)이 들어와서 ‘아들 면(葂, 3남)의 병이 차도가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니 기쁘기 그지없다. 조카 분(棻)의 편지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집의 사당도 평안하며, 어머니께서도 편안하시다’고 하니 감사한 일이다.
이흥종(李興宗)이 환곡(還穀, 춘궁기에 빌려준 곡식을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회수하는 일)하는 일로 형벌을 받고 죽었다니 매우 놀랍다. 그의 삼촌인 충청 수사 이순신(李純信, 1554~1611)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상심했고,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병세가 위중하다고 한다.
활 10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리(朴注沙里)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도착하여 곧 이리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곧바로 삼도(三道)에 전령을 내려 진영을 죽도(한산 산죽도)로 옮겨 그곳에서 잤다.
7월 16일(임진/8월 31일)
흐리고 바람이 서늘하였다. 늦은 아침부터 비가 퍼붓는 듯 종일 쏟아졌다. 경상 수사 원균(元均), 충청 수사, 우수사가 모두 나와 보았다. 소비포 권관이 우족(牛足) 등을 보내왔다. ‘명나라 장수 장홍유(張鴻儒)가 삼천진(三千鎭, 사천시)에 이르러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 여도 만호가 먼저 왔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 17일(계사/9월 1일)
맑다.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오전 10시쯤 명나라 장수 파총(把憁) 장홍유(張鴻儒)가 병사와 호선(唬船) 5척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그래서 수사들과 함께 먼저 사정(射亭)에 올라가서 청하니, 파총(把摠)이 배에서 내려 바로 올라왔다.
이들과 같이 앉아서 먼저 ‘해로 만리(萬里)를 고생하며 이곳까지 오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고 인사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작년 7월 절강(浙江)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이르렀는데, 요동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로를 지나는 곳에 돌섬과 암초가 많고 또 앞으로 강화할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며 굳이 말리는 마음이 매우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요동(遙東)에 머물면서 손광(孫鑛, 1542~1613)과 총병(總兵) 양문(楊文)께 보고하고, 올 3월 초에 출항하여 들어왔으니 어찌 수고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차(茶)를 마시자고 청한 후에 술잔을 권하니 감개무량하다. 또 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느라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127)-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