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86
●땀은 왜 날까?
체온이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調節)하기 위해 땀이 난다. 무더운 여름날 열심히 달리고 나면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땀은 피부(皮膚) 속에 있는 ‘땀샘’에서 만들어져 피부 표면의 작은 구멍으로 배출(排出)된다. 우리 몸에는 대략 350만 개의 땀샘이 있다. 땀샘의 수는 성인과 아동이 거의 같아 몸집이 작은 아이가 어른만큼 땀을 흘리기도 한다.
땀은 99% 이상이 수분(水分)으로 이루어져 있다. 땀이 피부 표면(表面)으로 배출되면 마르면서 몸 표면의 열(熱)을 가져간다. 이 과정에서 체온이 낮아진다. 더운 여름에는 우리 몸에 적당한 36~37도의 체온(體溫)을 유지하기 위해 땀이 난다.
덥지 않은데도 긴장(緊張)해서 손바닥이나 등줄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릴 때가 있다. 땀을 만드는 땀샘에는 두 종류(種類)가 있다. 더울 때는 에크린샘에서, 긴장했을 때는 아포크린샘에서 주로 땀이 만들어진다.
『과학 잡학사전 통조림 <인체 편>』 (지식을 쌓으려면 통째로 조목조목!) <엮은이 키즈나출판 편집부, 옮긴이 서수지, 감수 이경훈, 하라다 도모유키(原田知辛) (사람과 나무 사이, 2023)>, 68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6월 26일(기유/7월 24일)
비가 많이 내리고 마파람(남풍)이 거세게 불었다. 아침에 복병선이 도착하여‘적의 중선과 소선 각 1척이 오양역 앞까지 왔다’고 보고했다. 각(나팔)을 불어 닻을 올리고 적도(통영시 화도)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순천 부사 권준에게 군량미 150섬 9 말을 받아 의능(宜能)의 배에 실었다.
저녁에 김붕만(金鵬萬)이 진양의 적을 살피고 와서 보고 하기를 ‘왜적들이 진양 동문 밖에서 진을 합쳤는데 연일 큰비가 내려서 물에 막혀 있어 독기를 품고 접전하고 있다. 장차 큰물이 적진을 침수시키면 적군은 밖에서 군량과 구원을 계속 받을 길도 없으니, 만약 대군을 합쳐 쳐들어간다면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이미 군량도 다 떨어졌으니 우리 군은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편안히 기다리기만 하면 그 기세는 마땅히 백번이라도 이길 수 있다. 하느님이 순조롭게 도와주고 있으니, 수로의 적은 비록 오륙백 척을 합친다고 해도 우리 군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고 보고했다.
주) 의능(宜能)은 흥양(興陽)에 사는 승려로서 임진왜란 당시 전라 좌수영에 머물면서 유격 별도장으로 활약하였다.
주2) 김붕만(金鵬萬)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고 행주대첩을 지원했으며, 진주와 두치에서 적정을 이순신에게 알려주고, 제주 판관으로 칠천량해전에 참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적의 유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흑흑.
6월 27일(경술/7월 25일)
잠깐 비가 내리다가 개다가 반복한다. 정오에 적선 2척이 견내량에 출몰했다고 했다. 그래서 출항하여 나가 보니 적은 이미 달아나고 없어 불을도(弗乙島, 통영시 적도. 화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침에 순천 부사 권준과 광양 현감 어영담을 불러와서 군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충청 수사 정걸이 그의 군관을 시켜 ‘흥양의 군량이 다 떨어졌으니 3섬을 빌려달라’고 보고해 왔다. 그래서 기꺼이 보내주었다. 강진의 배가 왜적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6월 28일(신해/7월 26일)
잠깐 비가 내리다가 개다 한다. 나라 제삿날(명종 세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강진의 정찰선(탐후선)이 적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출항해서 견내량에 이르니 왜적 무리가 멀리서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더니 놀라서 황급히 달아났다.
바람과 조류도 거꾸로 흘러 들어갈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러 밤을 지내고 새벽 2시쯤 불을도(弗乙島)에 도착했다. 사내종 봉손(奉孫)과 애수(愛守) 등이 들어와 분산(墳山, 선산) 소식을 상세히 들으니, 정말로 다행이다. 수사 원균과 우수사가 함께 와서 군사를 논의하였다.
6월 29일(임자/7월 27일)
맑다. 하늬바람(서풍)이 잠깐 불더니 청명하게 개었다. 순천 부사 권준과 광양 현감 어영담이 와서 만났다. 어란포(於蘭浦) 만호(萬戶) 정담수(鄭聃壽)와 소비포 권관 이영남 등도 와서 만났다.
사내종 봉손(奉孫) 등이 아산으로 간다기에 홍(洪군우)과 이(李숙도) 두 선비와 윤선각(尹先覺)의 소식을 전할 곳에 편지를 써서 주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어 황명보(黃明甫, 충청 병사 황진), 최경회(崔慶會, 경상 우 병사), 서예원(徐禮元, 진주 목사), 이종인(李宗仁, 김해 부사), 김준민(金峻民, 거제 현감), 김천일(金千鎰, 의병장)이 전사했다고 전한다.
주1) 윤선각(尹先覺, 1543~1611)은 윤국형, 초명(初名)이 선각(先覺)이다.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임진왜란에 패배한 뒤 파직되었다가 비변사 당상을 지냈다. 형조참판이 되었을 때 유성룡과 함께 파직되었다.
주2) 황명보(黃明甫, 1550~1593)는 본명이 황진(黃進), 자가 명보다, 이순신과 무과 급제 동기. 1591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임진왜란 때는 진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 충청 병사가 되었고, 6월에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주3)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고경명, 최경회, 조헌 등과 함께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전공을 세웠다. 강화도, 김포, 양화도(楊花渡, 현 여의도)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여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주4) 서예원(?~1593)은 무신, 진주 목사 김시민이 사망한 뒤 그 후임에 임명,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
주5) 김준민(金峻民, ?~1593) 무신, 여진족 정벌에 참전, 거제 현령,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
주6) 최경회(崔慶會, 1532~1593)는 문신(文臣)이자 의병장(義兵將)이고, 소실(小室)이 진주성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한 논개(論介)로다. 흑흑흑. -86)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