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69

●2024년 3월 22일부터 4월 5일까지 전국(제주 제외) 만 13세 이상 1,777명을 한국갤럽이 면접조사 (CAPI, Computer Assisted Personal Interviewing)한 결과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0위를 발표했다.
이 발표에 의하면 1위가 이순신 장군(1545~1598)이다. 14%로 부동의 1위였다.
2위가 세종대왕(1397~1450) 10%, 3위가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 7%, 4위가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 4.5%, 5위가 김대중 전 대통령(1924~2009) 4.4%, 6위가 김구 독립운동가(1876~1949) 4.4%, 7위가 부모 4.3%, 8위가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1915~2001) 4.1%, 9위가 안중근 독립운동가(1879~1910) 4.0%, 10위가 유관순 독립운동가(1902~1920) 3.4% 순이었다. 이순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전국에 5,0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어설픈 해설이지만 이순신의 저서 <난중일기> 연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계사년 5월 1일( 갑인/ 5월 30일)
맑다. 새벽에 망궐례(望闕禮, 직접 왕을 拜謁하고 경의를 표할 수 없을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절하는 예식으로 대체로 근무지에서 왕과 왕비의 생일, 설, 단오, 한식, 추석 동지 등 명절날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음)를 행했다.
5월 2일(을묘/ 5월 31일)
맑다. 선전관 이춘영(李春榮)이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왔다. 이날 보성 군수(김득광)와 발포 만호(황정록) 두 장수와 회의를 하고, 나머지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미루었기 때문에 오지 못했다.
5월 3일(병진/ 6월 1일)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못 데리고 온 수군들의 수가 많으니 한탄스럽다. 선전관 이춘영이 돌아가고 이순일(李純一)이 왔다.
주) 참고로 전라 우수영은 해남, 전라 좌수영은 여수, 경상 우수영은 거제, 경상 좌수영은 부산에 본영이 있었다.
5월 4일(정사/ 6월 2일)
맑다. 오늘이 바로 어머니 생신날이지만 토벌하는 일 때문에 축하의 잔을 올리러 가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었다. 우수사와 군관들과 진해루(鎭海樓)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가 와서 함께하였다.
5월 5일(무오/ 6월 3일)
맑다. 선전관 이순일이 영남에서 돌아와서 그에게 아침밥을 대접했는데 전하는 말이 명나라에서 나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銀淸金紫光綠大夫)라는 작위를 내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와 순천, 광양, 낙안의 영공(令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담론했으며, 군관들에게는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
주) 위의 글에 비추어 볼 때, 임진왜란에서 떨친 그의 명성은 명나라에서도 널리 펴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5월 6일(기미/ 6월 4일)
아침에 친척 어른 신정(愼定)과 조카 봉(菶)과 해포(蟹浦, 아산시 염치읍 해암리)에 왔다. 저녁나절까지 퍼붓듯 내리는 비가 개천물이 넘쳐흐르니 기다리던 농민들을 만족시켜 주어 참으로 다행이다.
저녁 내내 친척 신정과 대화했다. 주) 아마도 어머니를 여수로 모셔 오는 문제를 의논했을 것이다.
5월 7일(경신/ 6월 5일)
흐리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을 먹고 진해루로 옮겨 공무를 보고 배를 타고 출발했다.
떠나기 전에 발포에 도망갔던 수군을 잡아 왔기에 처형(사형)하고 입대에 관한 사무를 태만이 한 순천의 이방은 일단 처형을 미루었다. 배가 남해 미조항에 이르자 동풍이 크게 불고 파도가 산더미 같아 간신히 배를 정박하고 잤다.
5월 8일(신유/ 6월 6일)
흐리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사량 만호(萬戶, 이여념, 李汝恬)가 나왔다. 우수사(원균)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 (남해군 창선도)에 있는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원균)의 망령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했다. 여기서 잤다.
5월 9일(임술/ 6월 7일)
흐리다. 아침에 출항하여 걸망포에 이르니 바람이 순조롭지 못했다. 우수사(이억기), 가리포 첨사 구사직(具思稷)이 와서 한자리에 앉아 작전을 토의했다. 저녁에 수사 원균이 배 2척을 몰고 왔다. -69-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