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 63

웅석봉1 2024. 7. 18. 13:03

210(을미/ 312)

 

아침에 흐리다가 점차 맑아졌다. 오전 6시에 출항해서 곧장 웅천현 웅포(熊浦, 진해구 남문동)에 이르니 적선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두 번이나 유인했으나 겁을 먹은 적군이 나올 듯하다가 도로 돌아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했다. 참으로 분하다. 10시쯤에 영등포 뒤 소진포(蘇秦浦, 거제 장목면 송진포)로 들어가 배를 매고 밤을 지냈다.

 

211(병신/ 313)

 

흐리다. 군사를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212(정유/ 314)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일제히 새벽에 출항해서 곧장 웅천(熊川)의 웅포(熊浦)에 이르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았다.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며 꾀어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없애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정말 원통하고 분했다.

 

이날 저녁에 도사(都事)가 우후(이몽구)에게 공문을 보냈는데,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수물자를 배정한 것이라고 했다.

 

저녁 8시경(초경)에 칠천도(漆川島, 거제시 하청면)에 이르자 큰 비가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 210일부터 36일까지 이순신이 원균, 이억기와 함께 7차례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웅포는 진해 남문동에 있다.

 

213(무술/ 315)

 

쏟아붓듯이 비가 오다가 저녁 8시쯤에 그쳤다. 적 토벌에 관해 의논할 일로 순천 부사(권준)와 광양 현감(어영담), 방답 첨사(이순신)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보았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 대방(大邦)과 옥지(玉只) 등이 돌아갔다.

 

214(기해/ 316)

 

맑다. 증조부의 제삿날이다. 이른 아침에 본영의 탐후선(探候船)이 왔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삼도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 우수사(원균)는 병으로 참석하지 않았고,

 

전라 좌도와 우도의 장수들만 모여 의론하는데,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꼴을 어찌 다 표현하랴, 어란포(於蘭浦, 남해군 송지면 어란리) 만호 정담수, 남도포(南桃浦,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만호 강응표(姜應彪)도 역시 그랬다. 흑흑흑

 

이렇게 큰 적을 맞아 무찌르는 일로 모인 이처럼 중요한 자리에 술에 만취하여 이렇게 되니, 그 인물됨이 한심하여, 원통하고 분함을 이길 수가 없다. 저녁에 헤어져서 진 친 곳으로 왔다. 가덕 첨사 전응린(田應隣)이 와서 만났다. -63)-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