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57
4월 20일(기유/ 5월 30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영남 관찰사(김 수)가 다급히 전문을 보내왔는데, ‘적들이 떼거리로 휘몰아 쳐들어오니 그 예봉에 맞설 수가 없고,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몰아치는 것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간 것 같으니, 전투 배를 정비해 와서 지원하는 일에 대한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고 했다.
주) 영남 관찰사의 심정이 다급하다.
4월 21일(경술/ 5월 31일)
맑다. 성 위에 군사를 줄지어 서도록 과녁 터에 앉아서 명령을 내렸다. 오후에 순천 부사(권준)가 달려와서 약속을 듣고 갔다. 주) 진법 훈련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4월 22일(신해/ 6월 1일)
맑다. 새벽에 정찰도 하고 부정사실도 조사하기 위해 군관을 보냈다. 배응록(裵應祿)은 절갑도<折甲島, 절이도(折爾島) 해전(海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 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로 가고, 송일성(宋日成)은 금오도(金鰲島, 여수시 남면)로 갔다.
또 이경복(李景福)과 송한련(宋漢連), 김인문(金仁問) 등에게 두산도(斗山島, 여수시 돌산도)의 적대목(敵臺木)을 실어 내리는 일로 각각 군인 50명씩 데리고 가게 하고, 나머지 군인들은 품방(品防)에서 공사케 했다.
주) 경상도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니 충무공은 더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4월 23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일기는 빠져있다.
5월 1일(경오/ 6월 10일)
수군(水軍) 지휘관들이 일제히 앞바다에 모였다. 날은 흐리고 비는 오지 않고 마파람만 세게 불었다. 진해루(鎭海樓)에 앉아서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李純信), 홍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등을 불러들이니, 모두가 분개(憤慨)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로운 선비들의 모습이다.
5월 2일(신미/ 6월 11일)
맑다. 삼도(三道)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1538~1601)과 영남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남해(南海)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 1542~1597), 미조항(彌助項, 남해군 미조면) 첨사(僉使) 김승룡(金承龍), 상주포(尙州浦)와 곡포(曲浦), 평산포(平山浦)의 만호(萬戶) 등이 하나같이 왜적의 소식에 놀라 달아나 버렸고, 군기물(軍器物) 등도 흩어 없어져 남은 게 없다”고 말했다.
가히 경악(驚愕)스럽고 놀라운 일이다. 정오(午時)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있는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모두가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이 있으나, 낙안(樂安) 군수(郡守) 신호(申浩, 1539~1597)만은 피하려는 뜻이 있는 듯하니 탄식이 절로 난다.
그러나 군법이 있느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일인가? 저녁에 방탑의 첩입선(疊入船) 3척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공문 3장(三丈)을 도착했다. 창평(昌平) 현령(縣令)이 부임했다는 공문이 있었다. 저녁에 군호(軍號)를 용호(龍虎)라 하고, 복병(伏兵)을 산수(山水)라 했다.
주) 첩입선(疊入船)은 여러 진영을 오가며 연락을 취하는 배. 3장(三丈)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 정승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블로그 적연)에서 인용함. 군호(軍號)와 복병(伏兵)은 암구호를 뜻하는 듯하다. -57)-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