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55

4월 1일(경인/ 5월 11일)
흐리다.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공무를 보고 활 15 순(巡)을 쏘았다. 별조방(別助防)을 점검하였다.
주) 망궐례(望闕禮)는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근무하여 직접 왕을 배알 할 수 없는 관리들(관찰사. 목사. 부사 등)이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또는 왕과 왕비의 생일이나 설, 단오, 한식, 추석, 동지 등의 명절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비는 의식.
4월 2일(신묘/5월 12일)
맑다. 식후에 몸이 매우 불편하여 점점 통증이 위중해져 온종일 신음(呻吟)했다.
주) 이순신은 4월 들어서 연 삼일을 통증에 시달렸다.
4월 5일(갑오/ 5월 15일)
맑다. 저녁나절에 비가 조금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4월 6일(을미/ 5월 16일)
맑다. 진해루(鎭海樓)로 나가 공무를 본 뒤에 군관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아우 여필(汝弼)을 배웅했다. 주) 진해루(鎭海樓)는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 입구에 있던 정자로 좌수영 남문 정문임. 옆에 활터가 있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됨.
4월 7일(병신/ 5월 17일)
나라 제삿날(중종비 문정왕후 윤 씨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사시(巳時)에 비변사(備邊司)에서 비밀 공문이 도착했다.
영남 관찰사(김 수)와 우 병마사(김성일)의 계문(啓聞)에 따른 공문이었다.
주) 사시는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 비변사(備邊司)는 임시 군사 기구였다가 삼포왜란 이후 정식 기구가 되어 점차 권한이 늘어나 최고 의결기관이 되었다, 계문(啓聞)은 신하가 임금께 올리는 글, 비밀 공문 내용은?
4월 8일(정유/ 5월 1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봉해놓았더니 저녁나절에 여필(汝弼)이 가지고 떠나갔다. 객창(客窓)에 홀로 앉아 있느니 온갖(萬端) 회포가 떠오른다.
주) 객창은 나그네가 거처하는 방, 만단(萬端)은 온갖 여러 가지.
4월 9일(무술/ 5월 19일)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동헌(東軒)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방응원(方應元)이 입대에 관한 일로 공문을 작성해 보냈다.
군관들이 활을 쏘았다. 광양 현감(魚泳潭)이 수색하는 일로 배를 타고 와서 날이 저물어 돌아갔다.
4월 11일(경자/ 5월 21일)
아침에 흐리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도로 기록한 문서를 순찰사의 군관 남한(南僩)이 가져왔다. 비로소 거북선에 쓸 돛을 베로 만들어 달았다.
4월 12일(신축/ 5월 22일)
맑다.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地字)와 현자(玄字), 총통(銃筒)의 포를 쏘아 마지막 실전 연습을 성공리에 마쳤다. 드디어 거북선의 건조가 성공했다. 어제 온 순찰사의 군관(南公)도 살펴보고 돌아갔다.
정오(正午)에 자리를 옮겨 동헌에서 활 10 순을 쏘았다. 좌수영(左水營)으로 올라갈 때 노대석(路臺石)을 보았다.
주) 지자총통(地字銃筒)은 거북선의 주포이고, 현자총통(玄字銃筒)은 임진왜란 당시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화포, 노대석(路臺石)은 말을 타고 내릴 때 디디던 큰 돌로, 관청이나 사가 대문 앞에 둔 돌. -55)-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