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51
2월 22일(계축/ 4월4일)
아침에 공무를 본 뒤에 황숙도(黃叔度)와 함께, 녹도(鹿島,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로 갔다. 가는 길에 흥양 전선소(戰船所)에 이르러 배와 집기류를 점검했다. 그리고 녹도에 다다라 곧장 봉우리의 새로 쌓은 문루에 올라가 보니, 아름다운 경치가 이 근처에서 으뜸이다.
녹도 만호(萬戶, 鄭運, 1543~1592)의 애쓴 흔적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흥양(興陽) 현감 배흥립과 능성(綾城) 현감 황숙도, 만호(萬戶)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아울러 대포 쏘는 것도 보았다. 촛불을 밝혀 이슥해져서야 헤어졌다.
2월 24일(을묘/ 4월 6일)
가랑비가 온 산에 내려 아주 가까운 거리도 헤아릴 수가 없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마북산(馬北山,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 밑의 사량(沙梁)에 이르러,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하여 사도(蛇渡, 고흥군 점암면 금사리)에 이르니, 흥양 현감(배흥립)이 먼저 와 있었다. 전투 배를 점검하고 나니 날이 저물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2월 25일(병진/ 4월 7일)
흐리다. 전쟁 방비에 여기저기 탈(頉) 난 곳이 많아 군관과 색리(色吏)들에 벌을 주었다. 첨사(僉使)를 잡아들이고 교수(敎授)는 내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최하위인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고 장계(狀啓)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하지 못했으니 우스운 일이다. 맞바람이 세게 불어 출항할 수가 없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주) 색리(色吏)는 감영이나 군아(郡衙)에서 곡물 출납· 보관하는 일을 하는 구실아치(조선 시대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는 하급 관리).
첨사(僉使)는 무관직인 金浣 (1546~1607)을 지칭하는데, 그는 이후 이순신의 신임을 받아 많은 전투에 참전 공을 세웠고 용사일록(龍蛇日錄)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교수(敎授)는 지방 유생(儒生)의 교육을 맡아보던 종6품 벼슬.
2월 26일(정사/ 4월 8일)
아침 일찍 출항하여 개이도(介伊島, 여수시 화정면 사도리 추도)에 이르니, 여도의 배와 방답진의 배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답진에 이르러 공사례(公私禮)를 마치고서 무기를 점검했다.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어 고민이지만, 전투선은 그나마 좀 온전한 편이니 기쁘다.
2월 27일(무오/ 4월 9일)
흐리다.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깎아지른 외딴섬인지라 사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몹시 근심스럽다. 방답 첨사(무의공 이순신)가 애를 썼으나 미처 끝내지 못했으니 어찌하라.
저녁나절에야 배를 타고 경도(京島, 여수시 경호동의 大鏡島)에 이르니 아우 여필 (이우신), 조이립과 우후(虞候, 병사의 참모장 이몽구) 등과 술을 싣고 맞이하였다. 이들과 함께 마시며 즐기다 해가 넘어간 뒤에야 관청으로 돌아왔다. -51)-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