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 50

웅석봉1 2024. 6. 20. 12:47

아산 현충사 경내의 충무정 입구

213(갑진/ 326)

 

맑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의 군관이 와서, 화살대 큰 것과 중간 것 100개와 쇠 50근을 보냈다.

 

214(을사/ 327)

 

맑다. 아산에 계신 어머니께 문안차 나장(羅將) 2명을 보냈다. ) 나장(羅將)은 조선 시대 군아(軍衙)에 속해 있던 사령(使令)

 

215(병오/ 328)

 

비바람이 매우 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크게 무너져 그것을 쌓았던 돌쟁이들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217(무신/ 330)

 

맑다. 나라 제삿날(세종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임금의 제삿날은 휴무하는 것이 관례인 모양이다.

 

219(경술/ 41)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白也串,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 백야도 맞은편)의 감목관청(監牧官廳)에 이르니, 승평(昇平, 순천) 부사(府使) 권준(權俊, 1547~1611)이 그의 아우와 함께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妓生)도 왔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수려한 경치를 말로 나타내기 어렵다. 날이 저물어서야 이목구미(梨木龜尾, 여수시 화양면 이목리)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도(呂島)에 이르니,

 

영주(瀛洲, 흥양) 현감 배흥립(裵興立, 1546~1608)과 여도(呂島) 권관(權管) 황옥천(黃玉千)이 마중 나왔다. 방비(防備)를 검열(檢閱)하고 사열(査閱)하였다. 흥양 현감은 내일 제사가 있다며 먼저 갔다.

 

) 감목관(監牧官)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종6품의 외관직, 영주(瀛洲)는 흥양(興陽)의 옛 이름, 지금의 고흥(高興). 권관(權管)은 조선 시대 변경의 진에 두었던 종9품의 무관. 영주산(瀛洲山)은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

 

220(신해/ 42)

 

맑다. 아침에 모든 방비와 전투 배를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들었고 무기도 어느 정도 갖추었다. 느지막이 떠나서 영주(瀛洲)에 이르니,

 

좌우의 산에 핀 꽃과 주변에는 향기로운 화초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옛날에도 영주(瀛洲)가 있다고 하더니, 또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 영주(瀛洲)는 중국의 진시황(秦始皇, BC259~210)과 한 무제(漢 武帝, BC156~87)가 불로불사약을 구하러 사신을 보냈다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 흥양(興陽)의 다른 이름이 영주(瀛洲)였으므로 이를 비유한 것임.

 

221(임자/ 43)

 

맑다. 공무를 본 뒤에 주인(흥양 현감 배흥립)이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활을 쏘았다. 조방장(助防將) 정걸(丁傑)도 와서 인사하고, 능성(綾城) 현감 황숙도(黃叔度)도 왔고, 배수립(裵秀立, 배흥립의 동생)도 와서 함께 취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밤이 깊어져 자리를 파했다.

 

신홍헌(申弘憲)을 시켜 전날 심부름했던 삼반(三班) 하인들에게도 술을 나누어 마시도록 하였다.

 

) 영주(瀛洲)는 흥양현(興陽縣)으로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흥양현 읍성이 남아 있다. 정걸(丁傑, 1514~1597)은 이곳 흥양 출신으로 일찍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웠고 경상 우수사, 전라 좌수사, 전라 병마사 등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황숙도(黃叔度)는 황승헌(黃承憲)의 자()로 선조 9(1576) 병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급제자. 당시 능성현감(綾城縣監)으로 재직. 삼반(三班) 하인은 지방 관아에 딸린 군노(軍奴), 사령(使令) 등의 하인. -50)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