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49
2월 3일(갑오/ 3월 16일)
맑다. 새벽에 우후(虞候, 수군절도사 보좌, 정4품) 이몽구(李夢龜, 전의 이씨, 1583년 과거 급제)가 각 포구의 부정사실을 조사하는 일로 배를 타고 나갔다.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탐라 사람이 자녀까지 모두 여섯 식구를 거느리고 도망쳐 나와 금오도(金鰲島, 여수시 남면)에 배를 대고 머물다가 방답(防踏) 경비선에 잡혔다’고 심부름꾼을 보내어 보고해 왔다.
문초하고 승평(昇平, 순천시)으로 압송하고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에 화대석(火臺石)에 쓸 돌 4개를 실어 올렸다.
주) 방답(防踏)은 당시 여수 전라좌수영의 본영이 있던 곳으로, <방답 진성>은 돌산읍의 옛 이름으로 첨사(僉使)가 주둔하며 관할하였다.
2월 4일(을미/ 3월 17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북봉(北峰, 여수시 군자동 종고산) 봉수대 쌓는 곳을 올라가 보니, 쌓은 곳이 아주 좋아 무너질 염려가 없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에야 내려와 해자 구덩이를 살펴보았다.
2월 7일(기해/3월 20일)
맑다가 바람이 세게 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발포(鉢浦, 고흥군 도하면 내발리)에 만호(萬戶)가 부임했다는 공문이 왔다.
주) 만호(萬戶)는 조선 시대 각 도의 여러 진(鎭)에 배치된 종4품 무관 벼슬.
2월 8일(기해/ 3월 21일)
맑다가 또 바람이 세게 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이날 거북선에 쓸 돛 베 29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는데, 조이립(趙而立)과 변존서(卞存緖)가 자웅을 다투다가 조이립이 이기지 못했다.
우후(虞候, 이몽구)가 방답(防踏)에서 돌아와 ‘방답 첨사가 방비에 온 정성을 다하더라’고 크게 칭찬했다. 동헌 뜰에 석주화대(石柱火臺)를 세웠다.
주) 석주화대(石柱火臺)는 전남 여수시 진남관 앞에 있는 돌로 만든 화대, 이순신이 군사들의 야간 훈련을 위해 만들었다.
2월 10일(신축/ 3월 23일)
안개비, 개었다 흐렸다 한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김인문이 순영(巡營)에서 돌아왔다. 순찰사 편지를 보니 ‘통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는가를 의심했다.’ 하는데,
그 흉측함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통역관들이 이미 잡혔지만 해괴하고 분통함을 이길 수 없다. 주) 순영(巡營)은 팔도에 파견된 감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
2월 12일(계묘/ 3월 25일)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밥을 먹은 뒤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나서 해운대(海雲臺, 여수시 동북쪽에 있는 작은 섬)로 자리를 옮겨 활을 쏘았다.
꿩사냥에 정신이 빠져 보고 있으니, 너무 조용했다. 나중에 군관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조이립(趙而立)이 시를 읊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49)-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