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46

아산 현층사의 이충무공 묘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한 여러 요인 중 하나는 고니시와 시마즈 군의 세력 약화였다. 가장 용맹하다는 시마즈 군의 병력이 겨우 2,000명만 가담할 정도로 이 전투에서의 역할이 미미하였다. 그것은 이순신과 노량에서 격돌하며 엄청난 병력 손실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시마즈 군 병력이 다수의 동군을 돌파해 자신들의 근거지인 규슈 서남부의 사쓰마번까지 후퇴한 시마즈의 퇴각은 지금도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에도 막부가 시마즈를 끝까지 공격했지만, 시마즈는 끝내 그 공격을 버텼고, 에도 막부도 시마즈 가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당시 반침략 세력이었음을 내세우며 조선과 통상을 원했다. 조선은 일본의 에도 막부가 원할 때 통신사를 파견하였고 광해군은 기유약조(己酉約條, 1609)를 체결해 주어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과의 통교를 허락하였다. 이렇게 조선과 일본은 전쟁의 상혼을 서로 간에 씻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이 조슈번(長州藩)과 연계하여 에도 막부를 타도하면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고, 그들이 정한론(한반도 정벌과 대륙으로의 진출)의 선두 주자가 되어 강화도조약(1876년)을 체결하며 조선을 또다시 침략했던 중심 세력이 되었으니,
역사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이 지금까지도 일본 내 가장 극우적 성향을 띠고 있다.
반면, 조선에 명나라 제독으로 참전하여 이순신과 깊은 전우애를 맺고 돌아간 진린의 자손들은 훗날 명나라가 여진족의 청나라에 망하자,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거 조선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들이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 있었던 고금도까지 왔고, 그 옆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니 이들이 광동 진씨이고, 지금도 해남에는 광동 진씨의 집성촌이 있다.
만약 조선에 이순신이 없었다면 임진년에 일본은 조선 정벌을 끝내고 바로 만주와 명나라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떤 역사가 전개되었을까?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역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역사의 인물일지라도 후대의 역사가가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평가 역시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세종과 이순신은 시대와 세태를 뛰어넘어 일관된 평가로 찬양하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은 이순신 같은 장수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효종실록 1659 윤 3월30일》을 보자.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을 보았는데,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원균의 패배가 있었으나 그 뒤 순신이 대적을 격파하였으나,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유명한 숙종 역시 이순신을 존경하여 1707년 현충사 편액을 하사하고, 그가 쓴 <현충사 제문>을 읽어보자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또한, 이순신을 높이 존경했던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증직(贈職)하였고, 이순신의 후손을 중용했다. 이순신의 신도비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비명을 지었다. 정조 임금이 직접 쓴 홍재전서(弘齋全書, 1799, 정조의 시가와 산문을 쓴 책)를 읽어보자.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해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명성과 의열(義熱)은 아직도 사람에게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또한 정조는 이순신의 일기와 장계, 서간첩, 그리고 이순신의 군무 보고 사항의 기록인 《임진장초(壬辰壯草)》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썼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까지 통합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다짐에서 보듯이 영원히 길이 남을 것이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 역바연 2023년 간행 참조함. -46-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