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36
그러자 이순신은 다시 영산강 하구 고하도(목포)로 남하하였고, 그곳에 108일 동안 머무르면서 판옥선 40여 척을 건조하는 등 군세를 재정비하였다. 그 후 완도의 고금도에 자리 잡은 것이 1598년 2월이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피난민들을 받아들였고, 해로통행증을 발행하였으며 염전도 운영하여 군량미를 확보했다.
고금도에서 조선 수군은 완전히 다시 일어났다. 군세는 한산도 시절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가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는 요충지였다면, 정유재란 당시에는 남해의 서쪽 끝인 고금도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1598년 5월,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진린(陳璘, 1543~1607)이 조선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수군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한양에 도착한 그는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장수 중에 군율을 어긴 자가 있으면 내가 혼쭐을 내어주겠소” 하하하
아무리 상국의 장수라지만 일개 장수가 일국의 왕 앞에서 하기에는 꽤 건방진 소리였다. 이 소리는 이순신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진린은 군량미 조달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를 담당하는 조선 관리의 목을 밧줄로 묶은 채로 말을 타고 끌고 다니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영의정 류성룡이 따졌으나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처럼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진린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진린과 이순신이 잘 지낼 수 있을까?’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1598년 7월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진린을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사슴과 멧돼지 고기, 생선과 좋은 술을 내어 5,000여 명의 명나라 수군을 배불리 먹였다.
조선에 와서 대접받기는커녕 군량미 지급조차 되지 않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있었던 진린은 이순신과의 첫 대면부터 그에게 호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명나라에 있을 때 장군의 이름을 많이 들었소이다. 환대를 감사히 생각하오” 으흐흐
명나라 수군 5,000여 명이 고금도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일본군의 귀에 들어갔다.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이후 몇 달 가까이 싸울 엄두도 못 내고 있었던 일본군은 고민이 깊었다.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휘 체계도 아직 바로 서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했는지 일본군은 느닷없이 고금도를 기습하였다.
옥포와 명량에서 혼쭐이 났던 일본 해군 총사령관 격인 도도 다카토라와 안골포에서 패했던 가토 요시아키가 무려 100여 척의 함대와 1만 6천여 병력을 이끌고 고금도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진린을 보고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제독, 어떻게 하시렵니까, 명군이 출정하겠습니까? 아니면 조선 수군과 함께 출정하여 합을 맞춰보시겠습니까?” 그러고는 진린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덧붙였다.
“아니지, 먼 길을 오시느라 아직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이번에는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진린의 입장에선 이순신이 제안한 조선 수군의 단독 출정은 정말 고마운 제안이었다.
제아무리 용장이라도 다른 나라에 파병되자마자 싸움터에 나가고 싶을 리 없었다. 조선 남해안의 지형이나 바닷길, 일본군의 전력 등에 대해 아직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으니, 진린은 이순신의 단독 출정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36)-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