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31
취임식을 마치고, 이순신 일행은 판옥선을 타고 바닷길을 통해 해남의 이진진성(梨津鎭城, 지방기념물 120호, 910m)으로 향했다. 이순신은 이 성에 머무르면서 그동안 쌓인 피로에 토사곽란(吐瀉癨亂)까지 겹쳐 고생을 많이 하였다.
다행히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해남 현감 류형(柳珩, 1566~1615)의 도움으로 쾌차하여, 일본군과 싸울 최적의 장소를 찾기 위하여 인근 어란진(於蘭鎭)으로 이동했다.
칠천량 해전 이후 일본군에게는 그동안 꿈도 꿀 수 없었던 전라도 바닷길이 훤히 열렸다. 아니 전라도 바다는커녕 견내량을 통과해 본 적도 없었던 일본군이었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 이후는 견내량을 막아서는 조선군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견내량 아래의 한산도에는 이순신의 본진이 있는 곳이었기에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곳이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의 간을 본 후, 대규모 함대를 조심스레 견내량을 넘어 조선 수군의 심장이었던 한산도에 진입하여 이내 점령할 수 있었다. 그때 한산도에는 단 한 명의 조선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본군은 몇 년간의 분풀이로 한산도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이어 일본군은 섬진강 하구를 돌아 여수를 향해 진격했다. 전란 이후 한 번도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던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가 유린당했다. 일본 함대는 서진을 계속하여 조심스럽게 고흥 반도까지 들어갔다. 칠천량에서 이겼지만 어딘가에 숨어있을 조선 수군이 두려워 서서히 서진했다.
그것이 이순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수군을 재건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고흥반도를 지난 일본군은 완도를 거쳐 해남의 어란진까지 얼쩡거렸다. 여기서 일본군은 조선의 판옥선 12척을 만났다. 칠천량 해전에서의 승리에 취한 일본군은 조선 판옥선을 추격했다.
이를 본 조선 수군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적선을 바라본 이순신의 표정은 임진년에 처음으로 해전을 지휘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선 수군이 패한 것이지 이순신이 패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순신은 아직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사령관의 심리 상태가 고스란히 부하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 수군의 사기는 차츰 되살아났다.
이때 이순신은 선제공격을 명했다. 우리 수군은 구령에 맞추어 함포 사격을 개시하자 일본군의 함선 8척은 등을 보이며 도망쳤다. 어란진 해전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해낸 첫 승리였다. 크하하하
어란진 해전(19승, 1597.8.27. 일본군 도망)
이어 이순신은 적의 대규모 공격에 방어하기에 불리한 해남 어란진을 떠나 진도 벽파진에서 진을 쳤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억기를 대신하여 새롭게 임명된 전라 우수사 김억추(金億秋, 1548~1618)가 판옥선 1척을 이끌고 합류했다. 이제 우리 수군의 판옥선은 13척이 되었다.
조선 수군이 이순신을 중심으로 진도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얻은 일본군은 기습 선제공격을 했으나 이순신은 미리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7일 밤 10시를 전후하여 일본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일본군의 전함도 13척이었다. 우리 수군은 역공을 가했고, 일본군은 상당한 피해를 당한 채 물러났다.
벽파진 해전(20승, 1597.9.7. 일본군 도망). 우하하하 31)-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