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29
그것은 오로지 충(忠), 나라 걱정 때문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며 만든 우리 군인이던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만든 우리 조선 수군이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돈을 들어 만든 우리 함대던가, 우리 거북선이던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실전처럼 훈련하며 경험을 쌓아 만든 우리 장병들이던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만든 우리 무적 해군이던가. 말로써 어찌 말을, 다 한 단말인가, 그러니 울음밖엔 더 나오겠는가. 이순신은 오열(嗚咽)하고 또 오열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순신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직접 몸을 일으켜 남해 쪽 전장을 향해 움직였다. 우선 임진년부터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장수들과 병사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순신이 직접 전투 현장에 가야만 패잔병들이라도 모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순신은 수군 재건을 위하여 7월 18일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를 거쳐 7월 19일 단성에 도착하였고, 이어 옥종, 수곡을 거쳐 8월 3일 진주에 도착했다. 이곳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이순신은 수군통제사 직을 제수받았다. 그날이 1597년 8월 3일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 중의 일부를 보자.
-임금은 이르노라.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으로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에게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도 역시 나의 묘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더 하리오!
이순신은 파직당하기 전에 정2품이었다. 이순신의 벼슬을 가로챈 원균 역시 정2품이었다. 그런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이순신의 품계는 정3품이었다. 이는 현재로 치자면 4성 장군 대장인 해군 참모총장을 직위 해제했다가, 다시 해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면서 3성 장군을 임명한 격이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장수들조차 비아냥거렸다.
이어 이순신은 곤양, 노량, 광양, 하동, 화개를 차례로 거쳐서 구례에 들어섰다, 이순신은 구례 현감 이원춘(?~1597)을 만나 밤샘 회의를 하였다. 다음날 이순신은 구례에서 조선 수군 출정 행사를 거행했다. 이원춘은 이순신의 합류 제의에 자신은 남원을 지키러 가겠다고 정중히 거절했고, 곧 이어진 남원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구례를 떠나 곡성으로 가는 길에 많은 피난민을 만났다. 그들은 이순신에게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이순신 일행도 함께 울었다. 8월 4일 곡성에 도착했다. 곡성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거북선의 돌격 대장 이기남(1553~?)을 다시 만났다. 또 울었다.
노량에서 살아남은 거제 현령 안위(安衛, 김제 출신, 1563 ~1644)와 영등포 만호(萬戶) 조계종을 만났다. 이들은 이순신을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하였다. 또한, 이순신을 만난 우후(虞候) 이의득(李義得, 1544~1598)이 패전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
“원균이 뭍으로 달아나고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원균의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습니다”
칠천량에서 도망하여 살아남은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 1551~1599)과도 만나서 이순신은 그에게 물었다.
“12척의 판옥선은 어디에 숨겨두었소?” -29)-계속-